“평화”를 모르는 평화유지군 ④
동티모르 하늘은 변덕스러웠다. 뜨거운 햇빛에 눅눅해진 모포를 말리려고 빨랫줄에 걸어놓으면 갑자기 시커먼 구름이 몰려와 장대비가 쏟아지고, 서둘러 모포를 걷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햇빛이 나와 곧 찜통더위가 시작되곤 했다.
파병 2-3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던 것 같다. 동티모르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적응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파병 기간 내내 매주 월요일엔 말라리아 예방약을 먹어야만 했다. 동티모르로 출발하기 전 각종 풍토병 예방접종을 했지만 말라리아는 예방 백신이란 게 없었다. 덕분에 말라리아 위험지역인 동티모르에서 생활하던 우리에게 말라리아 약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말라리아 약은 한번 먹고 나면 반나절은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약을 먹으면 간에 부담이 된다거나 먹어도 별 효과가 없다는 소문을 듣고는, 몇 번 안 먹는다고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건너뛴 적도 있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에 매번 거를 수도 없었다.
말라리아 약을 띄엄띄엄 먹었던 탓일까? 난 2001년 12월 31일 39도에 가까운 고열과 설사로 의무대에 실려갔다. 비몽사몽 선임들의 등에 업혀 의무대 병상에 눕혀진 나는 매주 한 알씩 먹던 말라리아 약 세 알을 한꺼번에 먹으라는 신묘한(?) 처방을 받고, 이틀이 지나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파병 기간 동안 상록수부대 안에는 수십 명의 말라리아 환자가 발생했고, 장염이나 다른 풍토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동티모르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일직 상황대기였다. 단본부 병사들은 대략 열흘에 한번 간격으로 상황실 밤샘 근무를 했다. 밤사이 부대 안팎에서 예상치 못한 일로 긴급한 연락이 오면 재빨리 상황을 기록하고 보고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영어로 들려오는 무전 메시지였다. 영어로 말하는 선명한 목소리의 전화를 받기도 쉽지 않은데, 송수신 상태가 불안한 무전기 소리를 제대로 알아듣는 일은 온 신경을 집중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적도 제각각인 누군가의 암호 같은 군대식 영어 표현을 듣는 일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일직을 서게 되는 날이면 기도할 따름이었다. 그저 오늘도 아무일이 없기를.
힘든 일은 사람들을 뭉치게 하는 힘이 있나 보다.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무더위와 풍토병을 함께 이겨낸 상록수부대원 사이에는 끈끈한 정이 있었다. 상록수부대 전체의 분위기도 좋았지만, 내가 속한 단본부 병사들 사이의 관계는 더욱 특별했다. 상대의 계급은 존중하지만 서로를 대하는 마음과 태도는 형, 동생 관계에 가까웠다.
자대에서는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혹시나 잘못 물어봤다가 괜한 갈굼을 당하지 않을까 눈치만 보며 끙끙거려야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언제나 무엇이든 누구에게나 편하게 물어볼 수 있었고, 고참과 후임 사이에도 막힘없는 “대화”라는 것을 할 수 있었다. 군생활에서 가장 힘든 이등병과 일병 기간의 대부분을 이런 형같은 고참들과 함께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는 정말 큰 행운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상록수라는 이름으로 함께 만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선임과 후임이 아닌, 진짜 형, 동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