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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만별 Nov 24. 2022

행복 지수 5점 만점에 6점!

매일 오후 2시, 재래시장에서는 무슨 일이?

 구립 도서관 근처에 내가 무척 좋아하는 커피숍이 하나 있다. 그곳은 테이블마다 생화 한 송이를 세팅해 둔다. 앤틱한 찻잔에 담아 나오는 라테는 딱 마시기 좋은 온도로 만들어져 나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구운 플레인 스콘에 사장님이 직접 만든 라즈베리 잼을 발라 먹다가 코끝이 시큰해진 적도 있다. 생화 한 송이, 고급스러운 찻잔, 라테 아트로 그려진 풀잎 모양, 스콘과 수제 잼 모두 오직 나만을 위해 준비된 것 아닐까, 나 지금 굉장한 대접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습니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오랜만에 촉촉해지러 커피숍에 갔다. 메마른 내 눈물샘을 자극해 주길 바라며 스콘을 주문할 때까지만 해도 행복 지수 5점.

 그러나 오늘은 '나 혹시 지금 코로나인 건가? 미각 기능 상실했나?' 싶을 정도로 스콘은 퍽퍽하기만 하고, 라즈베리 잼은 설탕 농도 조절에 실패한 건지 하나도 달콤하지 않았다. 실내 공기만큼이나 마음이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행복 지수가 2점에 가깝게 추락한다. 따뜻한 라테를 마셔도 체온이 오르지 않아 얼른 이곳을 뜨기로 한다. 반납하는 접시에는 스콘이 3분의 1이나 남아있다.


 커피숍 바로 앞 도서관으로 향했다. 오전인데도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할아버지 한 분이 4인용 책상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책의 어떤 부분을 정성껏 필사하고 계신다. 그 맞은편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무선 이어폰을 낀 채 책에 푹 빠져있다. 도서관은 (책을 좋아해서든 책이 필요해서든) '책'을 공통분모로 모인 사람들이 공유하는 오묘한 온기로 가득 차 있다.


 '아아... 따뜻해...'


 오늘은 운 좋게 명당을 차지했다. 도서관에서 명당은 창가에 일렬로 배치된 의자인데 의자 앞 난간에 다리를 툭 걸치고 눕다시피 한 자세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가에서 색채와 심리 관련 책 몇 권을 뽑아 와 느긋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간다. '도서관에서 책 읽기'는 단 한 번도 행복 지수 5점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다. 내가 정말 책을 좋아하는 건지, 사람들의 온기를 좋아하는 건지 그건 알 수 없지만.


 요리 관련 책을 집어 들고 뒤적거리기 시작하면 이제 집에 갈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얼른 점심 메뉴를 결정해야 한다. 아침부터 공기는 무겁고, 하늘은 뿌옇고, 몸은 으슬으슬하다. 내 몸이 탕이 먹고 싶다고 말한다. 집에 돌아오는 길은 재래시장을 통과하는 동선으로 정했다. 시장에 들어서자 장윤정 노래가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꽃>이라는 곡이다. 익숙한 멜로디라서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시장 한가운데를 걸어가는데 뭔가 이상하다.

 

 반찬집 앞에서 모자로 보이는 두 남녀가 앉았다 일어나기, 어깨 돌리기 같은 동작을 하고 있다. 어라? 맞은편 야채 가게 사장님도 몸 풀기에 열심이다. 휘 둘러보니 재래시장 상인들이 전부 가게 앞으로 나와 노래에 맞춰 맨손체조와 춤이 짬뽕된 동작을 하고 계시는 거다! 장윤정의 <꽃>이 처음부터 다시 반복된다. 뭐지? 신기해서 시계를 봤더니 2시 4분.


 아! 내 추측이 맞다면 매일 오후 2시는 시장 상인들의 스트레칭 시간인 것이다! 2시에 '뮤직 큐' 하면 상인들이 각자 자신의 가게 앞에 나와 굳은 몸을 풀고 식곤증을 이겨낸다. 시장 근처에서 8년을 살면서도 처음 본 광경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서로의 동작을 따라하며 맞은편 사람을 보고 깔깔 웃는 상인들 곁을 지나가는데 왠지 마음이 뭉클했다. 공동체 안에서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행위를 하는 상인들 사이에 형성된 일체감을 왜 내가 느끼고 있는 건지. 아무튼, 사람 사는 재미가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숭덩숭덩 썬 무와 애호박, 그리고 생새우 가득 넣은 시원한 탕을 끓여 먹을 생각에 생선 가게 앞을 기웃거리고 있으니 사장님이 가게 구석에서 나오신다. 나이 먹고, 아이 낳고 늘어난 건 주름살과 넉살 밖에 없는 내가 물었다.


 "아이고, 왜 사장님은 운동 안 하고 가게 안에 계셔요? 다른 사장님들 다들 나와서 열심히 하시드만~"


 아주머니는 까만 봉지에 새우를 넉넉히 담아 주시면서 조글조글한 손을 내젓는다.


 "나는 안 혀. 우리 가게는 시장 입구 쪽이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 보니께 챙피혀. 이제 저거(장윤정 노래) 세 번째 나오는 거 보니께 거의 다 끝났구만, 뭐."

(그렇다면 상인들의 스트레칭 시간은 약 10분이라는 말씀!)


 억척스럽기만 할 것 같은 아주머니가 부끄러워하며 말씀하셔서 나는 그만 깔깔 웃고 말았다.

 시장에서 집까지 돌아오는 길에 <꽃>이 계속 귓가에 맴돌아 구간 반복하며 흥얼거렸다. 원래 내가 하는 어떤 행위의 행복 지수는 5점이 만점인데 오늘은 뜻밖의 진귀한 장면을 목격하였으니 '시장 구경'은 6점이다. 커피숍에서 깎아먹은 점수를 겨우 만회했다.


 집에 돌아와 탕을 끓이면서 도서관에서 결론 내리지 못했던 질문의 답을 찾았다. 나는 책보다 사람들의 온기를 더 좋아하는 것이 확실하다.


 내일도 오후 2시에 시장에 나가 봐야지. 매일 선곡이 같은지 다른지 궁금해 미치겠으니까.



+덧1.) 생새우 찌개를 나름 맛나게 끓여 친정 엄마께 사진을 찍어 보냈는데 엄마의 답장에 곧 머쓱해졌다.


'그거... 김장용 새우인데...네가 맛있으면 됐지, 뭐..'



+덧2.) 글을 쓰는 도중에 '전통 시장'과 '재래시장' 중 어떤 단어를 택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국립국어원에 올라온 답변을 보고 '재래시장'으로 표기하였다.

국립국어원 답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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