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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만별 Apr 19. 2023

서점으로 소풍 갑니다

원기 회복에 박카스보다 직방인 것



고작 1박 2일 여행 뒤에 몸살이 났다.

인천 어느 섬에서의 짧은 여행이었건만.

동행한 세 살 어린 나의 친구가 멀쩡하다면 노쇠한 체력은 역시 나이 탓을 할 수밖에 없다.


오전에 두 시간 동안 반짝 몸을 움직이고 나면 남은 스물두 시간은 단전에서 겨우 에너지를 펌프질해 올려야만 생활할 수 있었다.


걸어서 5분 거리인 피아노 학원까지 아이를 데려다주는 것도, 데리고 오는 것도 녹록지 않을 만큼 피곤했다.


아이보다 일찍 잠들고서도 이튿날 아이가 학교 갈 시간이라고 흔들어 깨우면 그제야 추가 달린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열흘 동안 맥없이 시간을 축내며 살다가 엊저녁에는 느닷없이 냉장고 활짝 문을 열어젖히고 모든 식재료를 꺼내 정리를 시작했다.

손가락이 푹 들어갈 만큼 물컹하게 무른 애호박, 유통기한이 세 달이나 지난 요거트, 검게 쪼그라진 청양고추 등 버릴 게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어쨌든, 하기 싫은 집안일 목록 1순위인 냉장고 정리를 시작했다는 건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는 신호다.




초여름 날씨다.

오늘 아이는 학교에서 근처 개천으로 소풍을 간다고 했다. 기껏해야 반 아이들과 함께 걷는 짧은 산책일 테지만 기습적으로 귀에 꽂힌 '소풍'이란 말에 내 마음도 부풀어 버렸다.


'그럼 오늘, 나도 내가 좋아하는 곳으로 소풍 가야지.'


아직 몸이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아 버스를 타고 나갈까 했는데, 막상 집을 나서니 이 좋은 날씨에 걷지 않는 건 무례, 아니 '유죄'였다.


딱 기분 좋을 정도로 따끈하게 데워진 햇살을 받으며 소풍을 떠났다. 돗자리를 펴고 누울 수도 없고, 도시락을 열어 까먹을 수도 없지만 무언가 다시 시작하고픈 욕구가 태동처럼 느껴지면 어김없이 나는 그곳으로 향한다.


걸음이 멈춘 곳은 바로 서점.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 몫의 장난감과 동화책을 채우느라 내가 소장했던 책들을 80프로 이상 처분한 이후, 한정된 공간에 책이 무한 번식하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도서 갈증이 찾아오면 구립 도서관이나 알라딘 중고서점을 이용한 지 오래다.


그러나 오늘은 모처럼 정가를 지불하고 책을 사야겠다고 '큰' 마음먹었다.

(같은 책이라도 택배 박스에 담겨 문 앞에 툭 던져진 책과 내 손끝의 감각으로 뽑아 들어 직접 집까지 모시고 온 책의 가치는 상당히 다르게 느껴진다.)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코끝에 훅 끼치는 종이 냄새에 행복 세포가 즉각 활동을 개시한다.

(지하 주차장의 쿰쿰한 곰팡내, 강아지 발바닥 꼬순내, 냉동실 냄새  등 내가 사랑하는 냄새들 중 그나마 가장 정상적인(?) 게 '종이 냄새'다.)


서점에서 한두 시간 돌아다니며 책 몇 권을 훑어보다가 오늘 이 시간, 내 시선을 머물게 한 문장이 쓰인 책을 엄선하여 결제했다. 책 세 권이 담긴 종이 백을 달랑달랑 들고 집으로 되돌아가는 마음이 이렇게 흡족할 수가.



아들이 맛있게 먹는 것만 보고서는 절대 배부르지 않은 나인데, 빳빳한 새 책이 손에 들리니 점심을 걸렀는데도 배부르고 든든하기만 하다(고 말하고 집에 오자마자 짬뽕 한 그릇 뚝딱 해치운 나란 여자).


나,

이제 완전히 괜찮아졌나 보다.


아주 오랜만에 내게 선물한 활자들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다시없을 2023년의 봄을 보내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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