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보고 싶었다. 이제 막 12시가 지났으니까 엄마 회사도 점심시간이겠지. 할머니 방으로 가서 내 엄지발톱만 한 버튼 열두 개가 박힌 전화기 앞에 앉았다. 꼬불꼬불한 선으로 이어진 수화기를 들고 엄마 휴대폰 번호를 또박또박 눌렀다.
“어, 예솔아.”
엄마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엄마, 있잖아…….”
내가 간밤에 열이 펄펄 났다고, 할아버지 탁배기 심부름만 하고 내 간식은 하나도 못 샀다고 일러바칠 참이었다.
“예솔아, 잠깐만. 엄마 지금 회의 들어가야 해. 이따가 전화해도 될까?”
분명 ‘이따가 전화해도 될까?’라고 물었으면서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엄마가 먼저 전화를 툭 끊어 버렸다.
“으앙!”
참았던 설움이 터졌다. 할아버지 들으라고 일부러 더 크게 빽빽 소리 지르며 울었다. 오 분이 지나도록 할아버지 방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게 또 서러워 발을 동동 구르며 눈물, 콧물을 쏟았다. 그때, 녹슨 현관문이 귀를 찢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밥때가 되어 돌아온 할머니가 현관에 고무 슬리퍼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달려와 내 코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끈적한 콧물을 맨손으로 닦아냈다.
“에고에고, 우리 강아지. 왜 그래? 응? 왜 우는 거야? 또 열이 나? 아이고, 울어서 또 열 오른다, 아가.”
내 이마를 짚은 할머니 손에선 검푸른 바다 냄새가 났다.
“아가, 배고프지? 어서 밥 먹자.”
할머니는 점심상을 뚝딱 차려와서는 내 밥 위에 가시 바른 갈치살을 소복이 올려 주었다.
“할아버지는요?”
“됐다. 손주가 그리 서럽게 우는데 나와서 쳐다보지도 않는 인간은 밥 먹을 자격도 없는 거라이.”
그날, 점심시간이 지나서도, 해거름이 지나서도 엄마한테선 전화 한 통 걸려 오지 않았다. 엄마는 할아버지보다 더 배신자다. 낮에 그린 엄마 그림 옆에 지그재그로 금이 간 하트를 그려 넣고 스케치북을 탁 덮었다.
거실에 삐뚤게 매달린 달력에 엑스 표시가 열다섯 개로 느는 동안 할머니를 따라 바다에 나가는 횟수도 많아졌다. 탈의장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할머니는 뱃살이 세 겹이나 접힌 까만 고무옷 위로 납 벨트를 능숙하게 찼다. 머리에 얹은 커다란 은테 물안경이 태양을 반사해 반짝 빛났다. 한 손에 호미랑 빗창을, 다른 손에 오리발을 들고 바위 위에 올라선 할머니는 여전사 같았고, 바다에 둥실둥실 떠 있는 할머니는 매끈한 범고래 같았다.
할머니가 잠수하면 나도 같이 호흡을 멈추고 속으로 숫자를 센다. 나는 항상 30을 못 넘기고 '학학' 숨을 몰아쉬는데 할머니는 여전히 물속에 있다. 빨간색 천을 덧댄 할머니의 테왁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숫자를 세다가 50을 넘어가면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한다. 그때쯤이면 익숙한 얼굴이 수면 위로 불쑥 솟는다. 할머니는 테왁을 끌어안고 ‘호오이 호오이’ 숨비소리를 내며 나를 향해 빗창을 흔든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신호처럼 60초에 한 번씩 할머니의 숨비소리가 들려온다. 반나절이면 할머니의 망사리에는 전복, 보라성게, 대왕문어 같은 해산물이 가득 찬다.
나는 물질을 끝낸 할머니가 어서 물 밖으로 나와 물안경을 벗기만을 기다린다. 할머니 이마에서 시작해 눈 옆, 광대뼈, 코 밑을 빙 둘러 동그랗게 찍힌 물안경 자국을 볼 때마다 ‘미니언즈’ 캐릭터가 떠올라 킥킥 웃는다. 할머니 미니언즈가 망사리에서 가시 돋은 성게를 꺼내 겁주는 시늉을 해서 나는 비명을 지르며 꽁지가 빠지게 달아난다. 쭈그려 앉아 성게를 손질하던 해녀 할머니들이 멀어지는 나를 보며 왁자하게 웃는다.
“*어룬 노리갠 아이가 질인다!”
한 번은 배낭을 짊어지고 바닷가 근처를 걷던 관광객 여럿이 뭍에서 쉬는 해녀 할머니들을 커다란 카메라로 찰칵찰칵 찍었다. 할머니들이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 말로 막 소리를 질렀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셔터를 누르자 우리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 그 사람들 코앞까지 다가가서 짧게 뭐라고 한마디 했다. 그들은 할머니에게 고개를 두세 번 숙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아, 그래서 이곳 사람들이 우리 할머니한테 대장, 대장 했나 보다.
*어른의 놀이갯감으로 아이가 제일이다. (제주 방언)
(3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