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까만별 May 28. 2024

할머니의 숨비소리 (3화)

 망사리와 조락을 작은 리어카에 실으면 하늘 색이 봉숭아 물을 들인 내 손톱 색과 같아진다. 리어카를 끌고 할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제주에서 지내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순간이다.

 “우리 강아지는 커서 뭐가 되고 싶은가?”

 “쿠키 만드는 사람요. 만들다가 망치면 내가 먹고, 안 팔려서 남으면 그것도 내가 먹고. 매일 매일 쿠키 이만큼 먹을 수 있잖아요.”

 나는 양팔로 원을 최대한 크게 만들며 대답했다.

 “에이, 쿠키 장수 말고 느이 어멍처럼 대한민국에서 젤 유명한 회사에 다니면 좋지 않겠냐.”

 “엄마 회사가 그렇게 좋은 데예요?”

 “그럼. 느이 어멍이 대한민국서 최고 유명한 회사의 부장님이야. 그 회사에서 제일 젊은 나이에 부장님이 됐다겐. 어릴 때부터 영특해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는디, 고것이 결국 서울서 최고 좋은 대학교에 턱 붙고, 한국서 최고로 좋은 회사에도 턱 붙지 않았니.”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는 동안 머리 위로 엄지손가락을 세 번이나 추켜들었다.

 “부장님은 매일 바빠요? 엄마는 맨날 맨날 집에 늦게 와서 예솔이는 엄마 못 보고 잠들어 버리는데…….”

 엄마 없을 때 나를 돌봐주는 도우미 이모 이야기, 우리 반에서 자꾸 나를 괴롭히는 남자애 이야기 같은 걸 하다 보면 금세 집에 도착한다. 할아버지 방에 불이 켜져 있지만 방 주인은 안 보인다. 늘 그랬다.

 할머니는 신을 벗자마자 곧장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가 똬리 튼 이불을 탁탁 털어 개고, ‘한라산’이라고 쓰여있는 유리병들과 뚜껑이 사라진 반찬통을 들고나왔다. 할머니는 좁디좁은 부엌에서 문어를 삶고 전복을 손질하면서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물찌마다 이 물질허영 한푼두푼 벌어논 금전 서방님 술잔에 다 들어간다.”

 저녁상에는 문어와 전복 말고도 어제 내가 먹고 싶다고 했던 용가리 돈가스하고 후랑크 소시지도 있었다.

 “할머니도 울 엄마처럼 공부 잘했어요?”

 돈가스를 케첩에 톡톡 찍으며 물었다.

 “공부……. 할망도 공부가 하고 싶었지. 근데 할망 열네 살 때 우리 어멍이 오라방들만 학교 보내고 내한테는 책가방 대신 테왁을 줬다게. 계집애니까 물질이나 배우라고. 빈 망사리 매달린 테왁 안고 물 위에 떠서 며칠을 울어신지, 그때 생각허민 지금도 막 서럽다. 내가 느이 어멍 키우면서는 바당 근처에는 오지도 못하게 했다게.”

 “할아버지는 왜 물고기 잡으러 바다에 안 나가요?”

 “말 마라. 느이 하르방만 보면 할망 가슴에 막 불이 번진다. 젊을 땐 *풍중 노릇이라도 했지, 나중엔 모아둔 돈도 없이 술에 밥 말아 먹는 사람이 돼 버렸다겐. 느이 어멍 학비 댈라고 이 할망이 물질해서 모은 돈, 장판 밑에 꽁꽁 숨겨놨는디 그걸 어떻게 찾아 갖구선 술 먹구 화투 친다구 한 달 만에 몬딱 날려 버렷저. 자식 생각허민 사람이 어째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럴수가. 아이고, 할망이 니한테 별 소릴 다 한다.”

 할머니가 손바닥으로 앙상한 가슴팍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할머니 말을 다 이해한 건 아니지만, 할머니 얼굴에 주름이 유난히 깊게 파이는 걸 보고 그날 이후 할아버지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았다.


*물때마다 이렇게 물질해서 한푼두푼 모아 놓은 돈 남편 술잔에 다 들어간다.


*풍중: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운반하는 역할을 하는 남자.


(4화에서 계속)



작가의 이전글 할머니의 숨비소리 (2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