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샌님 Jun 25. 2023

남들은 본가에 간다는데

나는 본가가 찾아왔다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달리는 차에 장시간 몸을 맡긴다는 것이 큰 체력소모임을 알고 있다. 저체중에서 벗어난 뒤로 예전만큼 대중교통에 기절한 만큼의 피로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꺼려진다.


예전에는 단순히 '귀찮아서'라고 표현했는데, 이제는 그것을 넘어서서 몸에 부담을 주는 행위이기 때문에 꺼려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체력 없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부활동계의 내 가족들은 여전히 내가 만사가 귀찮은 사람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라벨링은 참 중요하다.


아무튼 그래서 이번엔 아빠가 일 년에 한두 번 있는 모임 약속이 잡혔으므로 엄마+동생 조합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사실 저번주에 도서전을 다녀온 뒤라 쉬고 싶었지만 예전만큼 주말에 누워있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묘하게 살만해서 가족들과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7-8월은 진짜 바빠서 더 시간내기 어려울 것 같아서 이기도 했다.


내 체력을 잘 아는 가족들은 역시나 금요일 저녁에 와서 토요일의 해가 떠있는 동안에 돌아가기로 했다. 금요일 오후, 급히 마무리할 일은 없었지만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해도 좋을 시간에 묘하게 들떠서 가족들과 먹을 저녁식사를 고르기 시작했다.


덥고 주차가 복잡하니 집 주변일 것, 음식이 깔끔할 것, 최근 자주 안 먹었을 것, 엄마가 사진 찍기에 좋을 것 등을 고려해서 맛집을 한 곳 골랐다. 친구가 오면 한 번씩 데려가던 곳이었다. 친구들은 웨이팅이 있어도 당연히 여기지만 더운 날 멀리 온 엄마와 동생을 밖에서 대기하게 하기 싫었다. 그러나 이 근 방의 식당은 분식점 아니고선 다 이런 식라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어서 퇴근 후 바로 가서 대기를 걸어두기로 마음먹었다.


5시쯤 엄마와 동생이 집에 도착해 있다는 연락을 받았고, 마음 편히 서류를 마무리하고 퇴근했다. 다행히 퇴근하자마자 도착해서 내 앞에 한 팀밖에 없었고, 대기를 걸어둔 뒤 나와서 동생에게 위치를 보내면서 전화하면 나오라고 했다. 덥긴 했지만 햇빛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조금 기다리다 보니 가게에서 전화가 와서 3분인데 테이블은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고, 창가좌석 괜찮으시겠냐고 연락이 왔다. 괜찮다고 한 뒤 먼저 들어가서 엄마에게 미리 자리에 대해서 알려 알아서 음식을 주문했다. 잠시 후 엄마와 동생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재회를 집이 아닌 음식점에서 하는 게 왜인지 웃겼다.


음식은 맛있었고,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먹는 식사도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특히 동생은 이곳에 온 후 겨우 세 번 정도 봐서 그런가 말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


감기기운도 있어서 빨리 씻고 쉬고 싶었지만 동생이 졸라서 코인노래방에 갔다. 혼자 다녀오랬더니 꼭 같이 가야겠단다. 코인노래방이지만 카드로 결제하는 코인노래방에 가서 한 시간을 불렀다. 엄마도 오랜만이어서 즐거워 보여서 재밌었다. 분명 처음엔 각자 노래취향으로 시작했던 것 같은데 뒤에는 추억의 만화 오프닝 배틀이 되어서는 엉망징창 소리를 지르고 있어서 진짜 웃겼다. 또 엄마가 오래간만에 노래 부르는 걸 찍어놔서 좋았다.


들어오면서 나 먼저 씻을 건데 태클 걸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일러둔 뒤 씻고 나왔다. 에어컨을 틀고 천국이라며 침대에 누워있는 동생을 발로 밀어 몰아내고 누웠더니 진짜 천국이었다.


들어오면서 사 온 아이스크림과 맥주 한 병을 나눠먹으며 좁은 싱글침대에 세 명이 누워서 한참을 떠들었다. 내가 컨디션이 별로인걸 안 엄마가 누나는 일찍 잔다며 거실에 이불을 깔지 않았으면 새벽까지 떠들었을게 뻔했다.


아침에 7시쯤 일어났지만 늦게 잠들었을게 뻔한 동생을 위해 8시쯤 깨우러 나갔다. 역시 엄마는 일어나 있었고, 동생은 기척을 듣고 바로 일어났다. 가볍게 씻고 커피와 과일을 챙겨 공원에 갔다. 일찍 가면 주차도 편하게 할 수 있고 평상도 차지할 수 있으니까.


아침엔 엄마를 위해 공원산책을 하고 점심은 동생을 위해 시내에 나가서 먹는 게 내가 짠 최선의 스케줄이었다. 다행히 공원은 나무가 많이 우거져서 양산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늘지고 시원했다. 중간에 지압하는 곳을 발견해서 평소라면 절대 안 했을 일을 했다. 어르신들 사이에 껴서 다 같이 맨발로 지압하기.


동생은 절대 안 한다며 구경할 거라고 우겨대다가 '나도 어제 코노 같이 가줬으니 너도 협조해라.'라고 하자 군말 없이 바지를 걷고 양말을 벗었다. 엄마가 너무 아파하며 어기적 걸어서 너무 웃겼다. 서로 걷는 폼을 보며 깔깔대다가 나와서 발을 씻었다.


빙 둘러 주차장 쪽으로 걷다가 적당한 평상을 발견해서 커피 한잔을 했다. 딱복을 좋아하는 날 위해 엄마가 가져온 복숭아를 먹으면서 커피를 마셨다. 무슨 조합인가 싶지만 맛있었다. '디카페인을 마실 거면 커피를 왜 먹냐'라고 툴툴대던 지옥의 주둥아리의 동생 놈도 내가 타온 디카페인 커피를 잘만 마셨다.


돌아와서 주차를 하고 지하철로 이동하기로 했다. 원래 엄마는 다인일수록 택시 타는 게 더 맞지 않아? 하던 사람이라 여기선 택시가 더 밀리고 비효율적일 수 있다고 설명한 뒤 지하철을 탔다. 요즘 전화로 엄마가 자격증 수업을 들으며 버스를 타고 다닌다고 자랑하더니 교통카드가 되는 신용카드를 자랑스레 꺼냈다.


지하철에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지만 네 정거장만 가면 되기도 하고 더우면 지하상가에서 쇼핑하는 게 더 낫겠다 싶었다. 고민하다 고른 점심도 맛있게 잘 먹었고, 시내 여기저기도 둘러보고 쉴 겸 카페도 갔다. 사람이 많이 없어 보여서 고른 카페였는데 착각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을 가족에게 소개하며 같이 즐기는 느낌이 좋다. 나는 낯선 곳에 와서 살게 된 것이지만 내가 있으므로 가족들은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다. 내가 이끄는 대로 어쩌면 더 즐거운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아무래도 k장녀이다 보니 이런 쪽으론 책임감이 막중한데 그걸 알아서인지 가족들은 늘 좋은 반응을 보여준다.


오후가 되어 피곤해서 마지막으로 지하상가를 둘러보다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기로 했다. 지하상가에서 동생이 마음에 다는 바지를 발견했고, 그에 맞는 벨트와 티까지 발견했다. 거기 주인분과 사이즈가 비슷해서 바지를 수선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기쁜 것 같았다. 보세치고 청바지 가격이 장난 아니었지만 그냥 흥정하지 않고 계좌이체를 해줬다. 동생은 돈 쓰는 우선순위가 확실한 놈이라 쇼핑은 거의 하지 않는다. 옷도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거라 그냥 내가 사주고 싶었다.


돈을 번다는 건 이래서 좋다. 쉬면서 지내는 동안도 나에게 돈을 별로 아끼지 않아서 아쉬움은 없지만 이런 제약이 있었다. 한정된 재화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 지금도 대단히 많이 버는 건 아니지만, 다음 달에 또 월급이 들어온다는 가정하에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이 다르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쓸 수 있는 것이 기쁘다.


엄마는 내가 밥값을 계산할 때마다 자꾸 카드를 주고 싶어 했지만 내가 사는 곳에 놀러 온 가족을 대접한다는 건 내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


밥값을 별 고민 없이 계산할 수 있어서 좋다. 옷 한 벌 해줄 수 있어서 좋다. 엄마아빠 신발도 고민 없이 사드릴 수 있어서 좋다. 물론 가계부를 쓰며 씀씀이가 너무 커지지 않게 경계는 하지만 문제는 내 씀씀이가 아니라 물가라며 합리화를 하기도 한다.


동생에게 나는 섬유유연제와 세제도 구분 못할 정도로 집안일은 젬병에 왠지 생활력과 체력은 없지만 지식으론 모르는 게 없고, 다른 곳에선 똑 부러지며, 어쨌든 혼자 다 잘하는 이상한 이미지인데.

우리는 연년생이라 1살밖에 차이 나지 않지만 어릴 때나 지금이나 맞먹으려 들지 않는 것도 이런 이상한 기대감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평소 그다지 부담감을 느낀 적은 없지만 한 번씩 누나는 당연히 안다던지, 할 수 있다던지 하는 의지를 할 때면 물론 할 순 있지만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우린 각자의 포지션이 잘 맞고 서로의 취향을 잘 맞추는데다 역린을 잘 알고 터치하지 않기 때문에 남매치고 사이는 꽤 좋다.


아무튼 집에 도착해서 배웅할 때쯤 내 체력은 한계에 다 달았고(무려 3주 연속 주말에 사람을 만나고 있다.) 엄마는 그냥 가기 너무 아쉬워했다. 그러다 못해 결국 차를 타기 전에 또 눈물을 보이셨고 동생과 나는 놀려댔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또 안 좋아졌다.


둘을 보내고 들어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밀린 빨래를 두 번 돌려 한번에 해치우고, 멍하게 엄마가 씻어놓은 방울토마토를 우적우적 씹다가 미열이 나는 것 같아서 약을 먹고 누웠다. 자기 전에 약을 한번 더 먹고 잠들었더니 일요일은 컨디션이 괜찮았다.


오전 9시쯤 눈을 떴지만 하루종일 웹툰보고, 책 읽고, 밥 먹고 약 먹고 실컷 뒹굴거리면서 보냈다.


이번 주말도 참 재밌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국제도서전에 다녀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