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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반그리너 Jul 17. 2023

3화. 보조바퀴를 하나씩 떼다

문득 페달을 밟고 두 발로 속력을 내고 싶어졌다.


  일하랴 애 키우랴 정신없이 살았어도 육아의 결정적 순간을 놓친 적은 거의 없었다. 옹알이, 뒤집기, 걸음마 등 첫 3종 세트는 모두 내 눈앞에서 벌어졌고, 처음으로 '엄마'라고 부르던 순간, 차창을 보며 별안간 한글 간판을 읽던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두고두고 아쉬운 순간이 있다. 첫째가 두발자전거를 타던 순간을 놓친 것이다.

  솔직히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주말 출근에 야근까지 둘 다 정신없이 바빴고 누구 하나 가르쳐 보겠노라고 나서지 않았다. 다행히 동네 친구의 할아버지께서 두 팔을 걷어붙였다. 아이는 일주일간 특별훈련을 받더니 금세 보조바퀴를 떼버렸다.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는 기분이 뭐랄까. 아기가 걸음마를 떼는 순간을 영상통화로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여섯 살 때 자전거 보조바퀴를 떼던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요즘으로 치면 소피루비쯤 되는 요술공주 밍키가 그려진 자전거였다. 아버지는 나름 요령을 발휘해 내가 단계별로 적응할 수 있게 왼쪽, 오른쪽 보조 바퀴를 순서대로 하나씩 떼주었다. 그렇게 조금씩 균형잡기를 터득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 주위를 두 바퀴로 돌기 시작했다.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리던 아버지의 환한 웃음, 그 뒤로 후광처럼 빛났던 쨍한 햇살은 아직도 인생의 명장면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정작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부모님이 만들어 준 중요한 순간을 나는 왜 아이에게 물려주지 못하는 걸까. 그 정도 정신적 시간적 여유 없는 삶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결국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그때부터 우선순위가 가려졌다. 더 이상 중요한 순간을 놓치지 말자, 힘들더라도 누군가에게 미루지 말고 내 손으로 직접 해보자. 

  직장에서 해방돼 직업인으로 방향 전환을 한 지 두어 달이 지났다. 그간 내가 한 일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를 둘러싼 보조 바퀴를 하나씩 떼어내는 것이었다. 이 보조 바퀴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육아와 일이라는 큰 바퀴를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바퀴를 돌리기는커녕 어딘가에서 넘어져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보조바퀴들은 일과 육아의 균형을 잡는 데 큰 도움을 줬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몸집과 나이, 본분에 걸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페달을 밟고 두 발로 속력을 내고 싶어졌다. 

  그래서 떼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여섯 살이 되어 밍키자전거의 보조바퀴를 떼어낸 것처럼 말이다.

육아의 보조바퀴, 친정엄마

  엄마는 첫째가 네 살 되던 해까지 봐주시고 육아 졸업을 선언했다. 곧이어 둘째 임신 소식을 듣고 육아의 세계로 재입문하셨다. 육아에 최적화된 성격이 아니셨기에 군대를 두 번 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 후로 지금까지 10년 넘게 아이 둘을 봐 줬고 집안의 요리와 살림을 담당했다. 

  재택은커녕 야근에 주말출근까지 야무지게 하는 딸과 사위 덕분에 일흔을 넘긴 엄마의 입에서 "나좀 살려줘"라는 절박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재고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퇴사를 했고 동시에 엄마도 기다렸다는 듯이 고향인 부산행을 택했다. 1970년대 말 결혼하러 상경한 후 두 딸에 손주까지 다 키우고 귀향하는 데 45년이 걸렸다. 그리고 곧 디데이가 다가온다.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와 내가 다른 도시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인즉슨 육아 뿐만 아니라 요리, 청소, 빨래 등 각종 살림을 내 몫이란 뜻이기도 하다. 

  살림 중에서도 요리는 친정엄마의 특화 분야였다. 만약 이것이 하향 평준화됐을 때 불어닥칠 아이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퇴사 후 두 달간 거의 매일 필사적으로 엄마를 붙잡고 레시피를 배웠다. 엄마의 비법을 하나라도 놓칠까 수첩에 빼곡히 받아적었다. 무형 문화재를 채록하는 심정이었다.

  된장찌개부터 제육볶음, 멸치볶음, 삼계탕, 오징어채, 두부찌개 등등 나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엄마가 해준 음식과 비슷한 맛을 내는 것이다. 결과는? 두발자전거 타고 동네 산책 정도는 다녀올 만큼의 요리실력은 된다.

사교육이란 보조바퀴

  맞벌이 가정의 사교육은 교육의 의미와 함께 보육의 목적도 있다. 매일 태권도장에 보내는 것도 그래서다. 일하는 부모는 그 시간을 아이와 함께 할 수 없으니 돈을 주고 보육 시간과 서비스를 산다. 그래서 노란띠인지 갈색 띠인지는 처음부터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저 아이가 그 시간을 엄마 없이 안전하게 지내다 오면 된다. 

  학습지도 마찬가지다. 직접 연산을 시키고 가르칠 시간과 자신이 없으니 누군가에게 아웃소싱하는 것이다. 방과후 돌봄도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공간, 서비스를 보유한 누군가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모두는 내가 집에 있으면 해야 할 이유가 자동으로 사라진다. 

  두 달간 적응 기간을 거쳐 각종 학습지와 돌봄 서비스를 하나씩 떼어냈다. 마지막 돌봄을 그만둘 때는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이것이 없었더라면 코로나와 함께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온라인 수업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없었더라면 아들은 방학 때마다 학원 뺑뺑이를 돌아야했겠지. 그래도 이제는 명예롭게 퇴장할 때. 어느새 아이도 돌봄에서 맏형이 되었다.  

  이제 보조바퀴 다 떼어냈고 페달을 밟을 차례다. 균형을 잘 잡을 지 넘어지진 않을지 두렵지만 마음만은 홀가분하다. 밍키자전거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제야 내 몸에 맞는 자전거를 찾았다. 

[사족]

  우리에겐 한번의 기회가 더 있다. 둘째의 보조바퀴가 남아있다. 수족구로 둘째가 유치원에 안 가는 일주일동안 마음먹고 자전거 보조바퀴를 떼어내기로 했다. 자꾸 페달을 찔끔 밟고 좀처럼 나가지 못하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아, 페달을 힘껏 밟아야 앞으로 나갈 수 있어."

  그러자 돌아온 딸의 한마디. 

  "엄마, 그게 어렵다는 거잖아."

  그래, 뭐든 처음이 어렵지. 한번 익히면 평생 몸이 기억하는게 바로 두발자전거란다. 엄마와 함께 한 이순간을 평생 기억하렴.

(4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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