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반그리너 Jul 03. 2023

2화. 내 인생 마지막 공짜 명함

'적당히'란 없는 세계

사진: Unsplash의Howard Bouchevereau


명함이 처음 생긴 건 대학생 때였다. 입학하자마자 학보사의 신입기자 모집 공고를 보고 시험을 봤다. 학보사는 대학기관이라 여느 동아리와 달리 선발이 까다로운 편이다. 기성 언론사처럼 논술시험과 면접까지 보고 합격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높은 진입 장벽 탓인지 지원자가 적게 몰려 나는 운 좋게 합격했다. 그리고 잠깐의 수습 기간을 떼자마자 학교 로고와 이름 석 자가 박힌 명함을 받았다. 내 인생 첫 명함이었다.


스무 살짜리에게 기자 명함은 그저 관상용이었다. 주로 학교 교직원이나 교수님이 취재원이다 보니 명함을 내밀 일이 거의 없었다. 외부인을 인터뷰할 때도 명함을 건네는 게 익숙하지 않아 자주 까먹고 돌아왔다. 그냥 나에게도 명함이란 게 있다며 친구에게 자랑하거나 책상이나 다이어리, 노트에 이름표 대신 붙이는 용도였다.


대학 졸업과 함께 언론사에 입사하면서 나는 또 한 번 새 명함을 얻었다. 학보사 시절에는 액세서리였던 명함이 기자 생활에서는 필수품이 됐다. 기자 간담회나 인터뷰를 갈 때면 내가 기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이 명함이었다. 명함을 깜박하면 교통카드 없이 버스를 탔을 때처럼 당황스러웠다. 명함이 다 떨어진 상태로 새로운 취재원을 만나면 기본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 같았다. 부서 인사이동이 있을 때마다 꼭 해야 하는 일 중에 하나가 새로운 명함을 신청하는 것. 그만큼 명함은 업무에 필수였다.


회사를 그만두자 회사 로고와 이름 석 자가 크게 새겨진 명함도 하루아침에 종이 쪼가리로 변했다(사원증 노트북에 이은 3대 멘붕 지점). 당분간 명함 들고 다닐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세상은 역시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퇴사 한 달 만에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하면서 나에게 또 한 번 명함이 필요해졌다.


프리랜서에게 명함은 마치 가게의 입간판처럼 '지금은 영업 중'을 알리는 표시였다. 회사를 그만둔 것일 뿐 일을 멈춘 건 아니니 나를 기억해달라는 일종의 전단지랄까. 다만 문제는 한 번도 돈 주고 새겨본 적 없는 명함을 '내돈내산(내 돈 주고 내가 산다)'해야 한다는 거다.


크X 앱을 깔고 가장 빨리 배송되는 업체를 골라 명함 디자인을 의뢰했다. 여기서 초보 퇴사자는 또 한 번 당황한다. 명함 디자인을 셀프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하기로 한 회사에서 서둘러 로고를 받고 스스로 명함 문구를 적어보기 시작했다. 처음 명함을 만들다 보니, 이 로고를 진짜 써도 되나? 가짜 프리랜서 기자가 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게 만든 명함 가격은 200장 기준 2만 8천 원(프리미엄 명함은 더 비쌈). 한 장당 140원씩이나 하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당장 내일 보내 줄 것처럼 하던 명함이 오지 않았다. 명함을 꼭 써야 했던 미팅 날짜는 이미 지났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 업체 사장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명함이 안 왔어요. 일주일이 지났는데요. "

사장님: "확인해 보겠습니다."

사장님: "어머 직원 실수로 누락이 됐나 보네요. 이를 어쩌죠. 정말 죄송합니다."

나: "네?????????????? 알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빨리 보내주세요ㅜㅜ"


잠시 후 다시 문자가 왔다.

사장님 : "정말 죄송합니다. 명함은 그대로 발송해 드리고 돈은 돌려드리겠습니다."

나 : "아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계좌에 도로 꽂힌 2만 8천 원. 돈은 굳었지만 여러모로 찜찜하다. 아무리 본인 과실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돈을 돌려줄지 몰랐다. 이런 실수를 하면서까지 돈을 받을 수 없다는 양심적인 사장님이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언제 진상 고객이 될지 모르니 보험용으로 빠르게 입막음 한 건 아닐까 생각도 든다.


물론 나도 "에이 그럴 수도 있죠. 돈 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호기롭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렇게라도 애타게 기다린 시간을 보상받고 싶었을지 모른다. 더 솔직히 말하면 돈 굳었다고 좋아하며 덥석 받은 것도 사실이다.


일을 하다 보면 누구든 깜빡하거나 실수할 때가 있다. 나 또한 기자 일을 하면서 황당한 실수를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선배들의 각종 훈계와 잔소리를 들으며 지나갈 뿐이었다. 누구도 내게 "염기자, 감봉 2개월에 처한다" "월급에서 차감해"라고 말하지 않았다.


프리랜서의 세계는 다르다. '적당히'가 도무지 없는 세계다. 적당히 엉덩이 붙이고 근무 시간 채우면 따박따박 월급이 나왔던 회사를 벗어나, 이 세계는 일한 만큼 정확히 내 몫을 가져가는 곳이다. 당연히 내가 한 실수도 내 시급에서 차감된다. 내가 한 행동의 책임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조금의 실수? 해도 괜찮아, 어차피 돈으로 메우면 되니까.


갑자기 경계를 넘어 다른 영역으로 내던져진 기분이 든다. 누가 이끈 것도 아닌 내 발로 걸어들어간 세계니 빠르게 적응하는 수밖에. 그럼에도 자꾸 삐져나오는 이 막막한 감정은 무엇일까. 어쩌면 공짜 명함은 초보 프리랜서에게 주는 웰컴 드링크가 아닐는지. 공짜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숙박비에 다 포함된.


그래서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거다.


[사족] 서랍 구석에 넣어둔 명함을 본 아들이 어느 날 물었다.

"엄마 그 초록색 종이로 된 게 뭐예요? 쿠폰이야?"

순간 웃고 넘어갔지만,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들아, 이거 장당 140원짜리야. 건드리지 말아 줘."

3화에서 이어집니다.

작가의 이전글 1화. 퇴직금마저 통장을 스쳐 지나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