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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연 May 09. 2024

음식 단상(斷想)

곰탕으로 '묻다.'


때가 되면 꽃이 지고 때가 되면 꿈도 진다. 라고 반쯤 쉬어버린 목소리로 떠들던 사람이 있었다. 목소리는 또 얼마나 큰지 한번씩 그렇게 어깃장을 놓듯 떠들어 댈때면 나는 숭덩 숭덩 썰던 파를, 그를 향해 확 집어던지고 싶어지곤 했다.

 커다란 솥 안에서는 엊저녁부터 끓여대던 곰국들이 불퉁스러운 소리를 내며 끓고 있고, 자신의 넋두리에 대꾸조차 하지 않는 나를 향해 그 사람은 혀를 찬다.

 ‘지 에미 닮아 물색 없는 년, 지 에미처럼 차가운 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물색 없고 차가운 나의 에미라는 여자, 그 여자도 어쩌면 저 사람에게 이 파를 집어던지지 못해서 떠나간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었던 것 같다.


 따가운 봄 볕이 가게 창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 사람과 나는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한다. 가게 밖에서도 보이도록 만들어 둔 통유리 안 커다란 화로, 그 안에 들어앉은 솥 안에서는 뽀얀 곰국이 흰 김을 뿜어내며 끓고 있다.

 한쪽 다리를 화로 옆에 걸친 그 사람이 구부정해진 어깨와 다르게 단단해 보이는 팔뚝으로 노를 젓 듯 크게 주걱을 휘젓는다. 얼그럭 덜그럭 소뼈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와 쌀뜨물처럼 우러난 국물을 보며 그는 만족한 듯 웃었다.

 오늘은 곰국이 정말 잘 우러났다며 정성껏 끓여 냈으니 손님들도 잘 드실꺼라며 또 혼자 좋아 웃곤 했다.

 난 그런 아빠가 싫었다.


 ‘캬아, 이집 곰탕은 정말 최고야!’

 ‘그럼요 저희가 얼마나 정성껏 끓이는데요. 곰탕은 정성이 최고죠.’

 계산을 마치고 나가는 손님들에게 한껏 굽히는 등, 비굴해 보이는 웃음 그리고 곰탕 속 구멍 숭숭 뚫린 사골뼈처럼 곰보자국이 숭숭 얽은 아빠의 얼굴.

 아빠가 웃을때면 그 자국들이 마구 일그러지며 동화책 속 도깨비처럼 보였다.

 난 그런 아빠가 참 싫었다.


 ‘너도 이제 열 살이나 됐으니까 니 애비 좀 도와!’

 어느 일요일 아침, 온 몸에서 김치 냄새를 풍기며 내 방으로 들어온 할머니가 나를 향해 눈을 홉떴다.

 ‘기집애가 지 애비는 저 고생을 하는데 쳐자빠져 누워 있어?’

 그때부터 나는 학교를 가지 않는 주말과, 평일 학교를 다녀 온 저녁에는 아빠와 함께 곰탕을 팔았다.

 잡뼈를 섞지 않고 사골만 정성껏 끓여낸 정직한 곰탕, 2대째 이어진 사골 곰탕 맛집으로 제법 소문이 난 가게에는 손님이 꽤 많은 편이었다.

 그리고, 할머니와 아빠와 나의 몸에서는 늘 소 뼈를 고을때 나는 누린내가 났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시간이 흘러 유독 내게만 심술 맞았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빠와 함께 곰탕을 판다.


 가게에 나와 파를 썰거나 숟가락 젓가락을 닦거나 깍두기를 그릇에 옮겨 담다보면 아빠의 뭉근한 눈길이 느껴질때가 있었다. 그럴때면 나는 차가운 얼굴로 외면했고 아빠는 짐짓 헛기침을 하거나 주방 아줌마들에게 객쩍은 농담을 늘어놓곤 했다.

손님들이 한차례 휘몰아치고 나간 오후 서너시경이 되어서야 먹게 되는 늦은 점심, 아빠가 뜬 나의 곰탕 그릇안에는 커다란 고기 덩어리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고생했다. 오늘 곰탕은 우리딸이랑 같이 끓인 거라 그런지 더 맛있네?’

 어색하게 웃어보이는 곰보자국 숭숭 얽은 아빠의 얼굴에는 이제 깊게 패인 굵은 주름들이 상흔처럼 굳어져 있다. 나는 대답 대신 커다란 깍두기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는 와작 하고 씹었다.


 밉고 싫던 아빠라는 사람이 아프다.

 때가 되면 꽃도 지고 꿈도 진다던 넋두리가 아빠의 삶에 대한 저주였을까, 에미 닮아 물색 없고 차가운 나를 두고 아빠도 져가고 있었다.

 어느날 새벽, 핏물을 뺀 뼈들을 솥 안으로 옮기다 넘어진 아빠는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고 척추 압박골절 진단을 받았다. 2주 가량의 치료를 받고 다시 가게로 돌아온 아빠는 또다시 어지럽다며 쓰러졌고 대학병원에서 다발성 골수종이라는 혈액암 진단을 받았다.


 ‘빨리 죽지는 않는 암이래. 아빠 계속 일 할 수 있어.’

 ‘병원에 있으니까, 우리딸이 끓인 곰탕이 더 먹고싶네?’

 ‘우리집 곰탕이요 우리 어머니 나 그리고 여기 이쁜 우리딸 이렇게 3대가 진짜 정성껏 끓이는 곰탕이예요.’


 죽을 날이 가까워서일까, 에미 닮아 물색 없고 차갑다던 내가 어느새 아빠에게 예쁜 딸이 되어 있었다.


 아빠가 없는 가게는 생각보다 잘 굴러갔다.

 이제는 내가 아빠 대신 새벽에 일어나 곰탕을 끓인다. 핏물 뺀 사골과 잡뼈들의 잡내를 제거한 뒤 푹푹 끓여 내다보면 온 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는다. 두 번까지 우린 곰탕에 미리 준비해 둔 사태와 스지를 넣어 다시 우려내다보면 어느새 훤하게 밝아오는 밖.

 문득, 아빠 생각이 났다.

새벽마다 펄펄 김이 오르는 곰탕을 보며 아빠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쪽 다리를 아빠처럼 화로 옆에 올리고 노와 비슷한 모양의 커다란 주걱으로 불퉁맞은 소리를 내며 끓고 있는 솥 안의 곰탕을 저어본다.

구멍이 숭숭 뚫리기 시작한 허연 뼈다귀들이 나의 주걱질에 와그락 다그락 소리를 내며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꽃이 진다! 꿈이 진다! 꽃이 진다! 꿈이 진다!


 물색 없이 눈물이 났다.

아빠의 꽃은, 아빠의 꿈은 피어 본적이나 있었을까

반평생 넘도록 곰탕과 나만 보며 살아 온 아빠의 인생에서 꽃과 꿈은 무엇이었을까.

 물색 없고 차갑다던 내 에미라는 여자가 아빠의 꽃과 꿈이었을까 아니면 정성껏 끓였다던 곰탕이었을까

 잘 먹고 간다며 웃는 손님들을 향해 곰보자국 얽어진 얼굴을 잔뜩 접어가며 웃던 아빠

 굽은 어깨를 더욱 수그려 인사하던 아빠…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처음으로 마음이 술렁거린다.


 화로에서 내려온 나는 어느새 온 얼굴을 적신 눈물을 닦아내고 시원하게 코를 풀었다.

 오늘은 장사를 시작하기 전에 아빠에게 가져다 줄 곰탕을 먼저 담아야겠다. 내 그릇에만 잔뜩 퍼담아 주던 커다란 고깃덩이도 듬뿍 넣어야겠다.

 나 닮지 않고 예쁜 지엄마를 닮아 다행이라며, 병실 사람들에게 자랑하던 푼수 같은 그 사람에게 내가 처음으로 마음 담아 끓여낸 곰탕을 가져다 줘야겠다.

그리고

아직 꽃은 지지 않은 것 같다고, 꿈도 아직 지지 않았을 꺼라고 말해줘야겠다. 쫀득한 스지와 밥알이 담긴 뽀얀 곰탕 한 숟가락 위에 빨간 깍두기도 하나 올려주며 나도 처음으로 아빠를 보고 웃어줘야겠다.


(친한 지인( 知人)의 이야기를 허락하에 수필로 엮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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