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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과학하는 여자M Mar 21. 2022

나는 교수님의 버리는 카드였다

우리 실험실 학생들 각각을 카드로 비유해보자.교수님은 이 카드를 들고 게임을 시작하신다.모두 소중한 카드겠지만, 한 장의 카드를 버려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면 교수님이 가장 먼저 버릴 그 카드. 그게 바로 나인 것 같다.
_박사 과정 2년차때 쓴 다이어리중
사진 출처_Unplash
카드게임을 했을 때, 제일 먼저 버려도 되는 카드가 된 기분이다.
학교 나가는 것 자체가 무섭고, 두렵다. 다들 나를 무시하는 것만 같다. 후배들도 나에게 질문을 안 한다. 그래... 나처럼은 되고 싶지 않겠지. 모든 것에 자신감이 하나도 없다. 무엇보다도 제일 힘든 건, 내가 교수님께 아무리 나의 성과나 혹시 교수님이 놓치고 지나가셨을지도 모르는 나의 장점을 어필을 해도 제일 먼저 버려질 카드라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카드를 가진사람이 카드의 중요도를 결정하는 그런 게임이다 보니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은 상황.아무것도 열심히 하고 싶지 않다. 그만 두고싶다.
 _박사과정 3년차때 쓴 다이어리 중


내 다이어리에 '버리는 카드'라는 단어는 박사과정 2년 차 때부터 계속 나온다. 아마 그 시기부터 무력감에 빠졌던 것 같다.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을 대학원생들이 분명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대학원생들에게 그 상황은 끝난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 나의 경우에는 박사과정 2년 차에 겪었던 이런 좌절감을 다른 선배에게 털어놓았다가 '네가 그렇게 저자세니깐 그렇지, 네가 당당하지 못해서 그런 거야'라는 조언을 받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었다.지금은 이해가 되는 조언이지만, 그 당시에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것 같아 더 힘들었다. 그 선배가 조금은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안 되었을까?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문제가 해결될지 말해주셨다면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위의 일기를 적은 뒤, 3년이 흘렀다. 그 3년 동안 울기도 많이 울었고 실수도 더 하면서 쌓게 된 나만의 방법들을 정리해 보았다.


01. 버려진 자리에서 내가 할 것들을 하는 뚝심이 필요하다

버리는 카드가 된 기분이 들었던 그 시기에 나는 모든 것에 자신감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원래의 나'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행동했던 것 같다. 쉽게 화나고, 실험실 사람들과 마찰도 빈번하게 생기고, 실험도 잘 안되고, 출근도 늦게 퇴근은 빨리 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이 시기가 인간관계 측면에서는 가장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그때의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이 아닌 것 같은데, 그 시기에 단기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알고 살아갈 것이라는 사실이 나를 밤마다 힘들게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학원생이면 대부분 이 시기를 지나가기 때문에 어느 순간 서로서로 다 이해하게 되는 시기가 온다. 그때 웃으며 동기애를 나누면 된다.


이 시기에 힘들었던 또 다른 하나는, 열심히 살고 있지 않는 내 모습이 스트레스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 스트레스를 없애기 위해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외부 강의도 많이 듣고, 생화학, 생리학 공부도 교과서를 보며 다시 꼼꼼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실험과 연구에 더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드라마처럼 '결국엔 인정받았다!'라는 건 없었다. 위에 열거한 노력들이 인정받지는 못했다. 절대 그런 인정들을 기대하지 말 것! 기대했다가 또다시 피폐해지는 시기가 오기 때문이다. 대신, 더 큰 것을 얻었다. 자기만족으로 공부하고 연구하며 내공을 쌓았기 때문일까. 이 시기에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구력이 생겼다. 특히,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나는 당당해.라는 힘이 생겼던 시기이지 않았나 싶다.


02. 잘되면 장땡

연구가 잘 풀리게 되면, 교수님과 박사님들이 "나는 네가 이렇게 잘 될 줄 알았어"라고 평가해 주신다. 그 말을 듣고 약간 허탈한 느낌마저 들었다. '마음고생을 정말 많이 했는데, 원래 잘될 줄 알았다라니...' 그때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잘되면 다 미화된다라는 것. 즉, 지금 비참한 현실 때문에 너무 속상해할 필요가 없다.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마지막 장식을 잘해보시길!

사진 출처_Unsplash


03. 다음 무대를 상상하고 준비하기

실험실에서 버려지는 카드가 된 것처럼 느껴질 때마다, 나는 졸업한 뒤, 일하고 싶은 곳을 리스트업 했다. 그 연구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내가 저 연구실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상상하며 자료조사를 했는데, 이것들이 나중에 포닥 지원할 때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 리스트가 포닥 지원 리스트가 되었고, 수치적으로 3년 넘게 리스팅을 하게 된 것이다 보니 포닥 지원할 때 이메일을 쓰기 수월했다. 특히나, 다음 스테이지에서의 내 모습은 지금보다 나은 시작이길 원했기에 좀 더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고, 상상 속의 내 모습은 지금보다 멋졌기에 미래의 내 모습을 보며 힘을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진 출처_Pixabay

박사님께 매번 혼만 나던 A라는 학생이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그 분위기에 휩싸여 실험실 내에서는 그 친구의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그 학생은 묵묵히 본인의 실험을 열심히 했다. 어느 날 그 친구의 실험이 소위 대박이 났다. 박사님께서는 "A가 이렇게 잘하게 될 거란 걸 알고 있었어. A는 ooo이라는 강점이 있고, 성격도 연구에 적격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박사님이 A의 ooo습관 때문에 평소 엄청 혼을 내셨고, 계속해서 "너는 ooo 때문에 성공 못할 거다"라는 평가까지 내는 것을 보았는데, 결국엔 ooo이 강점이 되는 것을 눈으로 목격했다. 그날 A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남들의 평가에 너무 힘들어하지 말기로.
그리고, 어제의 평가와 내일의 평가가 같이 않을 것이라는 확신.
저평가를 받을 땐 더 노력하여 나만의 구력을 챙기기!

                                                       _다이어리 한 귀퉁이에 적어놓은 나의 다짐


정말 힘이 들고 현재가 암흑같이 느껴지는 대학원생들에게, 몇 년 뒤에는 극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끝이 난다는 것을 알았다면, 버티기에 조금 수월하지 않았을까. 나는 다행히 암흑과 같던 시기가 지났고, 지금은 교수님과 좋은 관계로 지내고 있다는 것도 말하고 싶다. 다 지나고 나니, 감정적으로 바닥을 쳤던 시기가 나에게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나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나의 성격을 알게 되었고, 나에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_Pixabay


단순히 시간만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버텨내면 얻어지는 것이 분명 있다. 그만둬도 되는데 버텼기 때문에 그에 대한 선물은 반드시 주어진다. 이 글을 읽으실 후배님들이 이 시기에 너무 많은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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