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팀장의 이야기-1
아이는 없다.
앞으로도 내 인생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 곱슬머리 여자 아이를 보니 이번에도 그 결심은 오래가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만나 운명처럼 사랑에 빠질 거라는 생각은 서른까지였다.
그렇게 오 년을 더 흘려보냈고 백마 탄 왕자는커녕 괜찮은 남자도 서른다섯이 넘어가면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설령 좋은 사람이 있더라도 그들은 이미 괜찮은 아내와 함께 가정을 꾸렸다.
1999년에 발매된 Robbie Williams의 Supreme에 나오는 노래 가사처럼.
지하철을 타기 전에 문득 이 노래가 떠오른 것이 우스워 플레이리스트를 변경했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살이는 변함이 없다는 게 어쩌면 더 웃긴 일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은 코로나로 인해 뒤집혔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 출근시간 2호선에는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사람들이 서로의 불쾌한 숨결을 공유했지만
이제는 서로의 숨을 산소통으로 쓸 정도로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우리 회사처럼 재택을 준비하고 있었던 회사는 이 기회에 오피스에 들어가는 비용을 더 아끼고자 전 직원의 60%가량만 출근할 수 있게 자리를 날린 회사도 있겠지만,
직원들의 성화에 못 이겨 이 재택근무라는 문화를 눈물을 머금고 받아들인 회사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됐든 나도 주에 2~3회 정도 재택근무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이번에도 한국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빌어먹을 2호선에 사람들이 가득 차있었고 나는 힘없이 사람들로부터 밀려나 열차 한대를 떠나보내야만 했다.
다음 열차까지는 또 5분이 남았다.
어느새 노래는 끝이 났고 유튜브 프리미엄을 신청하지 않은 내 핸드폰에서는 광고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댔다.
광고를 끄고 5분 뒤에 도착하기로 한 열차가 시위 때문에 더 늦어질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러면 예정된 출근 시간보다 늦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핸드폰으로 팀원들에게 상황을 공유했다.
'예상치 못한 시위 때문에 조금 늦어질지도 모르겠네요, 급한 일 있으면 Teams로 바로 말씀해주세요'
팀장으로서 지각한다는 말을 대놓고 꺼내기에는 면이 서질 않았기에 시위를 핑계로 시간을 벌었다.
뭐, 어차피 핸드폰으로도 기본적인 일들은 볼 수 있고 어제저녁 늦게까지 도착지 측과 통화하느라 정신이 없다는 사실을 팀원들도 알고 있을 테니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겠지..
핸드폰으로 메일과 채팅을 확인했지만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다만, 오늘은 화주들과의 단체 미팅이 있어 미리 준비한 PPT 내용을 훑어봤다.
핸드폰에서 앱이 돌아가는 동안 굉음을 내며 열차가 도착했다.
간신히 몸을 밀어 넣고 양손을 X 모양으로 어깨를 감싸며 사람들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누군가 나의 어깨를 노크하자 나는 화들짝 놀란 체 뒤를 돌아보았다.
박 차장이 질식해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보라색 얼굴을 애써 펴내며 나에게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