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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물 Nov 09. 2024

빛나는 꼬리

-가려진 수초 너머로 핀


♬bgm: 진수영-해가 사라지는 시간


얕은 곳에서 햇볕에 기대어 먹이를 찾아다니던 나는,

해에 가까울수록 내가 가진 색도 빛날 거라 생각했었지.

수면 위에 닿을락 말락 하는 밝은 곳에서 내 비늘을 이끌고

헤엄을 쳐.


이곳은 먹이도 잘 보이지.


이곳은 참 배부르고 밝은 곳이야.

다른 물고기들보다 더 높은 곳까지 왔어.

죽어서 물 위로 떠오르는 물고기들도 있지만

난 아냐, 난 달라.

나는 살아있고 팔팔해.

꼬리로 힘껏 올라 반짝이는 해수면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 다시 물속으로 들어올 수 있어.


저 아래는 시커멓고 어두워.

난 저기서 태어났지만, 다시는 저기로 가고 싶지 않아.

저기서 나는 빛날 수 없어.


밝은 곳에서 먹이를 먹던 나는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헤엄칠 힘은 사라진다.

그럼에도 나는 무거운 비늘들을 이끌고 먹이에게로 간다.


쉬어가고 싶어.

쉬면 저 아래로 떨어질 거야.


나는 무거운 비늘들을 이끌고 다음 먹이로 간다.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헤엄칠 힘은 사라진다.

밝은 곳에서 보는 내 비늘의 색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더 이상 해는 어떤 의미가 있나.


둔해지는 움직임.

이내 멈춰버린 나는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다.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으로.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을까?


눈만 깜빡인 채 사방으로 둘러싼 물에 가만 누워있다.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눈물이 나를 감싸 힘없는 날 저 아래로 데려간다.


바닥에 닿은 나는 까맣다.

까만 곳에서 까맣게 있다.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모르는 채로 돌아다니다

지느러미에 부드럽게 닿는 수초에 눈을 뜬다.


아, 태초의 기억이 살랑이기 시작했지.

내가 알이었을 때,

이 어두운 곳에서 따스한 눈으로 

내 색을 바라보아주던 네 개의 빛이 있었어.

두 개의 빛이 말했지.


"꼭 짙은 물빛을 칠해둔 것 같네요."


그러자 또 다른 두 개의 빛이 말했어.


"맞아, 사랑스러운 색이야. 더 이상 바랄 게 없어."


네 개의 눈동자가 동그란 내게 입을 맞췄지.

그러고선 지금 내 몸에 닿는 수초로 나를 보호해 주었어.


그들은 어떻게 어두운 곳에서 나의 색을 볼 수 있었을까?


나는 눈을 감고 네 개의 눈을 떠올렸다.

내 기억 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네 개의 눈.

감은 눈으로 햇볕이 일렁이는 것 같아 나는 눈을 떴다.

내가 있던 얕고 높은 곳에 많았던 햇빛이 한 줄기 들어왔다.


초록빛으로 빛나는 수초 사이

빛이 내려앉은 자리로 나는 들어갔다.

햇볕을 한가득 안고 바랬던 비늘이

어두운 곳에 내려앉은 한 줄기 햇살에 

태초의 물빛으로 빛나는 걸 보았다.


아기 물고기 한 마리가 앉아 있었고,

나는 그 물고기의 눈을 들여다봤다.

두 개의 눈동자 안에는

나를 바라보던 네 개의 눈동자가 들어 있었다.


나를 바라보던 빛은 내 안에 있었던 거야.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사랑스러운 색을 가지고서.




짜디 짠 바닷속. 먹먹함으로 가득 찬 곳, 끊임없이 지느러미를 움직여 물살을 헤치고 나가야 하는 삶 속에서 먹이를 찾아다니는 것이 전부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먹이, 먹이, 또는 목표, 목표. 내 배를 불리기 위한 목표들. 더 높이, 더 높이. 남들보다 높이. 비교하며 살아가는 삶. 그 속에서 나는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게 전부란 말인가. 그렇다면 삶이 밑으로 떨어지는 순간엔 가치를 잃는 것인가.


모두가 저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이것저것으로 감싼 제 위치에서 떨어져 가장 아래 어두운 곳에서 본래의 나체로 있기를 두려워하는 이 속에서, 나조차도 내가 추구하는 삶이 두려워질 때 즈음 나란 사람의 의미를 생각해 본 적 있다. 이 글은 내가 가장 어두운 절망 속에서 몸부림칠 때 나를 위해 썼던 글이다. 


타인의 평가와 치장하며 살아가는 모든 겉치레가 나란 사람의 존재 가치를 결정한다면, 최초의 내가 잉태되었을 때의 기쁨은 무어란 말인가. 내 두 눈동자 속에 빛나고 있는 누군가의 숨과 사랑은 무엇이란 말인가. 


깨달았다.


자신이 밑바닥일 때도 곁에 있어주는 사랑을 모두가 진정한 사랑이라 말하는 것을 보면, 모든 껍데기가 벗겨졌을 때 발가벗겨진 채 덜덜 떨고 있는 내 모습이 가장 사랑받을 수 있는 모습이란 걸. 사랑받을 가치가 이미 충분하다는 걸 말이다. 부모님이 내게 원하는 것이, 내가 기뻐하면서 사는 것이듯.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아주는 내 안의 빛을 나 자신이 보아주어야겠다.


세상에 처음 태어나 있는 힘을 다해 흘렸던 눈물의 값, 그 작은 주먹의 사랑스러움, 뜨지 못한 눈과 납작한 코, 생명을 깎아 나온 연약한 핏덩이를 있는 힘껏 안은 채 살아가자. 얼마큼 자라도 여전히 그것이 나의 본질임을, 최초의 기쁨과 사랑스러움은 변하지 않음을. 


나는 감히 타인에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들이 겉으로 보이는 내가 가진 것으로 나를 무례하게 대한다면, 아이가 갓 태어났을 때의 부모의 기쁨을 고작 핏덩이 하나에 기뻐하는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하는 행위와 같다고 말이다. 


나를 몇 등급 고깃덩어리로 보기 전에, 내 눈동자 안에 있는 네 개의 눈동자를 봐줬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누구이든지요. 그런다면, 나는 내 눈동자로 당신의 옷이나 머리나 가방이 아닌, 당신의 눈동자는 얼마나 독특한 빛을 가지고 있는지 들여다볼 테니. 그러지 못하겠다면 내게 그런 사랑을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안에 있는 네 개의 눈동자로 내 안의 빛을 들여다볼 때면, 차마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것 같거든요.


이게 세상 안에서 내가 가져야만 하는 유일한 날카로움인 것 같습니다. 

부디 아무도 찔리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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