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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삶

by 클로다 이야기 Feb 26. 2025

연말, 일년만에 한국인 지인을 만났다.

10년 전, 스페인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상태로 온 그 분은 어느덧 델레(DELE, 외국어로서의 스페인어 능력 검정 시험) C1 레벨을 보유하고 있고 스페인어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일년 만에 만났는데, 그때도 지금도 스페인어가 늘지도 않고, 쓸 기회도 별로 없고, 그다지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고 같은 푸념을 늘어놓는 나를 발견한다. 나도 매번 같은 말만 해대는 내가 참 답답하고 지겨운데 상대방은 오죽할까.

“유라씨, 앞으로도 계속 스페인에서 살 거죠?”

“네, 한국에서 살 계획은 전혀 없어요.”

“그럼 유라씨 본인을 위해서라도 배워야 해요. 계속 틀려도 얼굴에 철판 깔고 그냥 부딪혀야 말이 늘어요.”

진심 어린 조언과 마음은 너무나 감사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어눌한 스페인어를 하는 내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운 나는 그게 참 쉽지가 않다.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일도 시도해 보기 전에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해결해 주길 바란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런 나도 참 별로다. 가끔 남편이 나 혼자서 해보도록 부추기면 나는 또 “내가 너 하나만 바라보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까지 이민 왔는데 너가 해주는 게 당연하지.”를 시전한다. 

옛날, 영어도 잘 못하던 시절 생판 모르는 이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며 뭐든 혼자서 해결해 나가며 살아온 과거의 나는 도대체 어디 갔는지. 역시 사람은 결핍이 있거나, 절실하거나 막다른 길이 부딪혀 더 이상 갈 때가 없거나, 저 아래로 떨어져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때 생존력이 나오는 건가.

사지 멀쩡한 어른 아이가 될 때마다 무력함을 느끼고 남편에게 미안하면서도 지금 당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지 스페인어는 내게 열정을 가지고 배우고 싶은 언어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배워야 하는 언어, 썩 탐탁지 않지만 결코 놓을 수 없는 언어로 자리잡고 있다.

일년이 지나도 큰 진척이 없는 나의 스페인어 학습 의지와 미지근한 나의 반응을 본 지인이 이어 말했다.  

“유라씨, 나중에 시간이 흘러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해봐요. 그땐 정말 유라씨 혼자 모든 일을 다 처리하고 살아가야 할 때가 올 수도 있어요.”

이 말은 좀 더 강력하게 다가왔다. 정말 그런 날이 오겠구나. 가까운 미래 될지 먼 미래가 될 지는 모르는 거지만, 남편과 나 둘 중 누가 먼저 가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언젠가는 그 날이 오겠지. 

스페인어 학습 고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들은 그 말은 그날 이후로 계속 뇌리에 박혀 맴돌았다.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로 넘어오면서 내 머릿속에는 그날 이후로 ‘죽음’이라는 주제가 자리잡았다. 누구나 태어나면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간다. 죽음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은 사람마다 그 정도가 다르겠지만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영역이라 그런지 늘 궁금증이 생긴다. 남편이 먼저 가는 그 날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반대로 내가 먼저 가게 된다면 남편은 어떨까. 며칠동안 머릿속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는 ‘죽음’. 

어느 날, 자려고 누웠는데 문득 이 모든 순간이 ‘찰나’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매일 밤, 각자의 자리에 누워 책을 읽고 농담을 주고받고, 숨이 터질 듯 끌어안고 같은 말을 하는 남편과 잠을 청하는 이런 일상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고 그 날이 오면 우리 둘 중 남은 하나는 오늘의 이 장면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겠지. 그날은 원하지 않아도, 기다리지 않아도 무조건 오게 되어 있다. 그 미래에서 오늘을 떠올리면 그저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며 ‘찰나의 순간’이었다고 느끼지 않을까. 

연말에 들은 그 지인의 말 한마디는, 스페인어 학습에 약간의 의욕을 더해 줌과 동시에 오늘 하루에, 현재에 더욱 집중하며 살아가겠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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