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금희의 그림 읽기(35)
렘브란트, 마르텐 솔만스(Maerter Soolmans)의 초상, 1634, 캔버스에 유채, 209.5x135.5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여기 오른손을 허리에 댄 자신만만해 보이지만 앳되고 치기 어린 초상화가 있다. 28살인 렘브란트가 <유대인 신부>보다 30년 앞서 그린 작품이다. 전통적으로 부부의 초상화는 펜던트로 따로따로 그려지는 경우가 보통이다. 부부의 초상화는 남편을 왼쪽, 아내를 오른쪽에 배치한다.
보통 왕과 왕비 그리고 고관대작만이 서 있는 전신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따라서 이런 경우, 네덜란드가 상인 계층의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시민 사회였고, 막대한 재력을 가진 저명한 가문이었기에 특별히 예외로 인정되었다.
전통적인 부부의 초상은 서로 상대방을 향한다.
마르텐과 오프젠은 렘브란트가 실물 크기의 서 있는 모습으로 그린 유일한 중산층 커플이다. 마르텐의 아버지는 개신교 난민으로 안트베르펜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종교의 자유를 찾아왔다. 그리고 신대륙인 브라질의 올린다(Olinda)에서 직수입한 원당을 가공하는 제당소로 큰돈을 벌었다.
네덜란드에는 밀가루 전병에 꿀을 발라 먹는 토속 음식이 있는데, 꿀은 비싸고 귀해서 누구나 자주 먹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설탕과 사탕수수가 수입되자 단맛에 푹 빠진 네덜란드인들은 와인은 물론 우유와 맥주에도 넣어 마셨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들은 설탕물이라도 마셨다. 그로부터 340년쯤 뒤에 우리도 그랬었다.
1634년 6월 27일 새해 첫날 출항한 동인도 회사 상선이 6개월 후 암스테르담에 입항했다. 전 세계의 귀중품을 가득 실은 상선이 들어오면 도시는 축제처럼 들썩거렸다. 다음 날이면 어떤 배가 무슨 화물을 싣고 왔는지 신문에 실렸다. 그 목록을 보면 당시 유럽인들의 생활상이 눈앞에 그려진다.
말라카 후추, 정향나무, 초석, 인디고 염료, 명의 청화백자 219,027점, 고려와 일본 도자기 52 궤짝, 절인 생강과 다과류, 일본산 청동, 일본산 칠기류, 다이아몬드 원석, 진주와 루비, 페르시아산 비단 원사와 원단, 중국산 비단 원사, 실론산 설탕…
이 목록 중 ‘고려 도자기’가 나온다. 그러나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수입해 간 것이다. 1592년의 임진왜란과 1597년의 정유재란 때, 우리 도공들이 납치되어 일본에 도자기 문화를 전파하였기에 ‘도자기 전쟁’이라 불린다. 그래서 고려와 일본의 도자기가 하나의 목록으로 작성된 것이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계란껍데기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는 지독한 근검주의자’라는 영국인 오웬 펠덤의 기록도 있다. 그러나 네덜란드 사람들은 남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암스테르담에 주재하던 영국 대사 월리엄 템플은 “네덜란드 사람들은 단 한 푼의 구전(口錢)을 남기려고 목숨 거는 자들”이라고 평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누구나 셈법이 밝았다. 그러나 이는 모두 영국인의 시각이다.
17세기 후반 3차례의 영국-네덜란드 전쟁으로 네덜란드의 제해권이 영국으로 넘어가며 두 나라는 갈등에 휩싸였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더치(Dutch)’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영국인들의 관습이었던 대접한다는 의미의 ‘트리트(treat)’에 ‘지불하다’의 ‘페이(pay)’로 바꾸어 함께 식사한 뒤 자기가 먹은 음식만 계산한다는 ‘더치페이(Dutch Pay)’라는 말을 만들어 네덜란드인들의 인색함을 조롱하였다.
1633년 마르텐이 오프젠과 결혼했을 때, 그는 20살의 법대생이었으며 정치 지망생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불과 8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마르텐은 신혼부부임을 암시하는 장갑을 왼손에 들고 있다. 이는 신부의 아버지가 딸의 부양 의무를 신랑에게 넘겨준다는 의미로 장갑을 건네는 상징적인 제스처였다.
[마르텐 솔만스의 초상] 부분
렘브란트는 전통적인 기법을 재해석하여 적용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의 현란한 붓은 의상의 다양한 재질, 특히 복잡한 레이스 깃을 완벽하게 묘사했다. 부채꼴 형태로 하얗게 색을 칠한 뒤 검은 선을 그려 상의와 레이스 사이의 공간감을 잘 표현했다. 윤기가 흐르는 망토와 바지까지 장인의 정성으로 한 땀 한 땀 공들인 솜씨가 드러난다. 렘브란트는 그 검은빛의 광택을 화려하게 그러나 너무 번쩍여서 천박하게 보이지는 않도록 회색 톤으로 차분하게 처리했다.
이 작품들은 이 천 년대 초반까지 헤라르트 테르 보르흐의 <리젠트풍의 복식을 입은 남자>와 <리젠트풍의 복식을 입은 여자>라고 오인된 채 로스차일드 가문이 소장하고 있었다. 리젠트(Regent)란 네덜란드 시, 주, 연방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귀족들이 주축인 상류사회를 말한다. 예술과 과학의 만남으로 작가와 작품 명 그리고 제작시기에 대한 오류를 바로 잡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2015년 1억 6천만 유로(약 2,120억)에 매각 의사를 밝히자, 치열한 경쟁 끝에 네덜란드의 국립미술관과 프랑스 루브르 미술관이 공동구매를 하였다. 세계적인 유대인 금융재벌이 독점하며 140년 동안 단 한차례만 공개된 귀중한 작품이었다. 그간 거래된 렘브란트의 작품 중 최고가를 경신했다.
17세기 초엽 리젠트 풍이 유행하여 장롱마다 검은색 주름 옷들이 가득 차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의 복식에 대한 재미있는 글이 있다.
“네덜란드 본토박이 사람들은 세상에서 옷을 가장 이상하게 입는다. 겉옷은 걸치지 않는 대신 속옷을 켜켜이 겹쳐 입는다. 상의에 일곱 벌, 하의에 아홉 벌은 껴입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멀리서 그네들의 옷매무새를 보면 엉덩이가 겨드랑이에 붙어 있는 것 같다. 또 네덜란드 여자들은 남편 바지를 속에 입고 그 위에다가 치마를 두른다.”
네덜란드는 북해를 면해 5월 하순에도 경량 패딩을 입어야 할 만큼 쌀쌀하고 흐린 날이 많다. 최고 평균기온이 섭씨 18도이고 최저 평균기온은 섭씨 10도이니 으슬으슬하다. 17세기 유럽에는 소빙하기가 찾아와 더욱 추웠고, 요즘처럼 방한 의류가 흔치 않았기에 속옷을 여러 겹 입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래서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의 코스탄자의 배가 불룩한 의상 때문에 임신을 했다는 논란도 있었다.
<마르텐 솔만스의 초상> 부분
한껏 넓게 만든 레이스 칼라로도 부족한지 허리에는 커다란 꽃모양에 화려한 리본으로 매듭을 지었다. 실크 스타킹의 주름과 아이보리색과 금색으로 어우러진 레이스가 돋보인다. 마르텐의 구두를 장식한 장미꽃은 회색과 흰색을 배합하여 교묘하게 은색 실크처럼 빛난다. 그러나 이 꽃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처럼 짧았던 그의 일생을 보여주듯 지나치게 크고 과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절제와 중용'을 비켜간 벼락부자의 취향을 보여준다.
렘브란트, 오프젠 코피트(Oopjen Coppit)의 초상, 1634, 캔버스에 유채, 210x134.5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오프젠은 부유하고 명망 있는 암스테르담 가문의 세 딸 중 장녀였다. 그녀는 마르텐과 결혼한 지 1년 만에 렘브란트의 모델이 되었다. 오프젠는 23살이었고 첫 아이를 임신했다. 신부는 두 살 연상이기도 하고, 동안인 신랑보다 훨씬 노숙해 보인다. 그 결혼은 친정과 시댁의 동맹의 결과였다.
남편의 의상에 비해 오히려 소박해 보이는 부인의 옷차림은 화려한 액세서리를 위해 양보한 듯하다. 머리 장식과 귀걸이, 목걸이, 팔찌, 반지, 부채에 달린 체인까지 황금과 진주의 러시이다. 오프젠은 아마 결혼반지를 진주목걸이에 걸은 것으로 보인다. 그때는 진주가 다이아몬드보다 비쌌다.
두 사람은 남편이 부인을 향해 한 발 내딛는 전통적인 자세를 취해 서로를 이어준다. 렘브란트는 청록색 커튼으로 둘을 서로 연결했지만, 바닥 타일의 선이 어긋나서 부부라는 인상만 준다. 이렇게 두 사람이 따로 그려진 까닭은 벽난로나 현관을 사이에 두고 벽에 따로따로 걸려는 목적이었다.
<오프젠 코피트의 초상> 부분
두꺼운 실크에 도트 무늬가 새겨진 귀하고 비싼 옷감임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벨기에 안트베르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과 두 번째로 큰 도시 레이덴은 영국에서 원료를 수입해 직물 가공으로 부를 축적한 도시들이었다. 그러나 백년전쟁으로 원료를 수입하지 못하게 되자, 기술자들이 영국으로 이탈했다. 그래서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최고의 부를, 플랑드르는 쇠락의 길로 양국의 명암이 엇갈리게 되었다.
바로크를 대표하는 두 화가의 행보는 판이하게 달랐다. 루벤스는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온 뒤 안트베르펜을 중심으로 전 유럽을 무대로 활동했지만, 렘브란트는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오지 않고 암스테르담에서만 활동한 화가였다. 루벤스는 군주를 비롯한 고관대작을 모델로 대작을 남겼지만, 렘브란트는 중산층의 평범한 이들의 개성이 담긴 초상화를 그렸다.
이 그림들은 도시의 대표적인 초상화가인 렘브란트에게 의뢰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 부부에게 닥칠 운명을 그때는 누가 알았을까? 첫 아이를 임신하고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던 젊은 부인은 그녀에게 닥친 시련을 어떻게 헤쳐 나갔을까? 아마도 실리적인 국민성과 친정의 부 그리고 북구의 여인다운 강인한 턱 선과 골격으로 꿋꿋하게 잘 이겨 냈기를 바랐다. 다행히 이름이 같은 마르텐 피테르츠(Maerten Pietersz) 대위와 재혼하여 남편보다 더 오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