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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금희 Jun 25. 2024

렘브란트는 왜 자화상을 100점이나 그렸는가?

최금희의 그림 읽기(43)


렘브란트 판 레인, 골드체인을 한 젊은 남자의 초상, 수염이 자라는 자화상, c. 1635, 목판에 유채, 상파울루 미술관, 상파울루



여기 우리 자신이나 친구의 얼굴보다 더 낯익은 얼굴이 있다. 영국의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그가 후세에 솔직하게 선사한 가장 위대한 자서전이다”라 말했다.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레이덴에서 22살에 자화상을 처음 그렸다. 그는 옷차림과 모자를 바꿔가며 귀족처럼 근사하게 차려입기도 하고 때론 거지처럼 그리기도 했다. 그는 빛을 컨트롤하며 자신의 감정을 묘사하는 연습을 했다. 작고 정확한 붓질로 자신감이 넘치는 잘생긴 남자로 말이다. 



렘브란트는 약 40년의 세월 동안 100여 점의 판화, 스케치, 회화로 자화상을 그렸지만 현재 남아있는 자화상은 80여 점이다. 렘브란트가 초기에 그린 자화상은 표정, 자세 그리고 빛의 효과를 실험하기 위해서다.



렘브란트는 이 자화상을 그리며 솔직하게 보이는 대로 자신을 그렸다. 서양미술에서는 ‘생각하는 대로 그리는 초상화’와 ‘보이는 대로 그리는 사실적인 초상화’라는 두 부류가 있다. 


렘브란트, 부랑자로 변한 자화상, 1630, 에칭,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이것은 렘브란트의 초기 자화상 중에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수염도 깍지 않은 거지로 분장했다. 1632년부터 10년 동안 렘브란트는 성공을 만끽했다. 자신에게 초상화를 주문하는 이들의 검정 옷과 뻣뻣한 리넨에 싫증난 나머지 화려한 모피와 옷을 입었다. 그런 그가 거지로 자주 변장을 한 걸 보면 자신의 부가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렘브란트, 깃털 달린 베레모를 쓴 남자의 ‘트로니’, c.1635~1640, 마우리츠하위스, 헤이그



여기 표정과 자세가 비슷한 <부랑자로 변한 자화상>과 <깃털 달린 베레모를 쓴 남자의 ‘트로니’>가 있다. 렘브란트는 사람들의 성격을 깊이 파악하기 위해서 나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를 탐구한다는 것은 적극적인 개입과 적절한 거리 두기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짓과 과장 없이 솔직해야 한다.



렘브란트의 전기를 쓴 프랑스 작가 에밀 미셸(Emile Michel)은 이렇게 묘사했다. “렘브란트처럼 생각과 기쁨 그리고 사랑과 혼돈의 비밀스러운 면을 작품 속에 마음껏 드러낸 화가는 없다. 너무도 당연한 듯이 찾아온 잔혹한 시련에도 좌절하지 않았던 사람, 그의 존재 자체를 지배하면서도 모든 것을 뒤로 밀어버렸던 예술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죽는 순간까지 지켜낼 수 있었던 사람! 이런 순박한 성품과 주체할 수 없는 천재성의 서글픈 갈등을 솔직하게 드러내 준 화가는 렘브란트 외에는 없다.”



렘브란트가 <톨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그린 뒤 그의 그림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그의 판화 한 장이 당시 일반 노동자의 4개월치 월급에 해당했다. 1663년에는 첫 부인에 이어 진정으로 사랑했던 헨드리케가 죽고, 5년 후 아들 티투스도 사망했다. 그러면서 렘브란트는 복잡한 사생활로 세상의 단맛과 쓴맛을 보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이후 그의 삶과 가족이 예술의 중심으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사스키아와 아이들과 자화상을 그렸다. 그러나 1642년 이후 더욱더 진실한 삶을 작품에 담아내는데 전념을 다했다. 


알프레히트 뒤러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 1500, 67.1x48.9cm, 알테피나코테크, 출처: 위키디피아



서양미술사에는 자화상을 그리는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독일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알프레히트 뒤러가 1500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도르 문디]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다고 하는 나르시시즘이 넘치는 자화상이다. 그러나 뒤러는 베네치아를 여행했지만, 다른 지역을 방문했던 기록은 없다. 그래서 다빈치의 [살바드로 문디]보다는 플랑드르 화가인 한스 멤링의 [세상의 구원자]를 보고 본래 금발을 갈색으로 바꿔 자화상을 그렸다는 게 더욱 설득력 있다.


                     한스 멤링, 세상의 구원자, 1478, 알테피나코테크



그러나 모피코트는 화가 신분으로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다. 귀족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다. 당시 초상화라면 3/4으로 몸을 돌린 모나리자의 자세가 통상적이었다. 뒤러는 예수와 마리아를 그리는 데 사용했던 정면상 기법을 자화상 그리는 데에도 이용하였다. 이는 예술가의 창조행위가 신의 창조능력에 버금간다는 신 플라톤주의 예술론의 구현이었다. 그래서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은 공개되지 않다가, 뒤러가 죽은 뒤 뉘른베르크 시청에 기증되었다. 



“나.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스물여덟 살의 나 자신을 적절한 색으로 그렸다.”라는 말이 그의 사인과 함께 비문에 적혀 있다. 미술사에서 가장 특이한 자화상인 이 그림을 뒤러는 남들이 보아주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그렸다. 



이후 사실주의의 구스타프 쿠르베가 아이돌 같이 잘생긴 자신을 그린 <화가의 초상>이 있다. 쿠르베는 자부심이 넘치는 자화상으로 뒤를 이었다. 이는 ‘생각하는 대로 그리는 초상화’의 부류이다.


구스타브 쿠르베, 허리띠를 매는 남자, 화가의 초상, 1845~1846년경, 1846년 살롱,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 파리(사진 중앙 파란빛은 유리에 미술관 조명이 반사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렘브란트처럼 자아를 성찰하는 초상화를 그리는 부류로 빈센트 반 고흐가 그 뒤를 잇는다. 이는 ‘보이는 대로 그리는 초상화’ 부류이다. 모델이 필요 없고 거울로 자신을 관찰해서 그리기 때문에 습작을 하며 다양한 의상과 표정을 취했다. 
 
 

렘브란트, 자화상, 1669, 캔버스에 유화, 마우리츠하위스 헤이그



렘브란트는 골동품을 광적으로 수집했다. 지금 쓰고 있는 베레모도 17세기에는 이미 유행이 지나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100년 전에 살았던 화가 브뤼헬은 역사화나 성서화를 그리며 옷차림과 배경을 플랑드르로 했다. 이를 보며 성서의 이야기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하여 더욱 실감이 났다. 그러나 네덜란드 북부에 사는 렘브란트는 역사적인 사실 그대로 고증해야 한다고 생각해 소품을 준비했다. 17세기 레이덴 대학에 동방학과가 생겼지만 기초적인 수준이었고 오리엔트인들이 어떻게 터번을 매는지도 모르고 있을 만큼 무지했다.



자신의 예술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고민하던 렘브란트는 말년에 예술가로서는 한물가 10년 동안 아무 주문도 받지 못했다. 일찍이 17세기에 렘브란트 전기를 쓴 이탈리아의 미술사가 필리포 발디누치(Filippo Baldinucci)는 초상화 주문이 줄어든 이유가 모델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판매 목적이 아닌 자신만의 예술적 성취를 위한 자화상을 그렸다. 



[자화상] 부분



렘브란트는 물감 위에 불투명색을 칠해 색조를 부드럽게 하고 물감을 긁어내며 광택을 내는 등 유화에서 쓰는 모든 기법을 사용했다. 그리곤 물감이 마르면 붓이나 팔레트나이프로 미세하게 자국을 내기도 했다. 


렘브란트, 63세의 자화상, 1669, 캔버스에 유채, 86x70.5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이 작품은 그가 사망하기 몇 달 전에 그린 석 점의 자화상 중 하나이다. X선 촬영 분석에 따르면 렘브란트는 처음엔 붓을 들고 작업하는 화가로 그렸다가, 중간에 나이 들어가는 노인의 얼굴로 수정하였다. 따라서 피부와 색채에 집중하여 느낌을 표현하려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63세의 자화상> 부분



이 사진은 빛으로 반사되는 부분이 다른 그림보다 많다. 이는 얼굴에 물감을 집중적으로 발랐기에 물감 두께에 의해 반사되는 부분이다. 때때로 팔레트 나이프로 물감을 여러 번 두껍게 발라 인물이 빛으로 감싸 안긴 느낌을 주었다. 그는 감동적인 유화 효과를 내기 위해 나중에는 손가락으로 직접 칠했다. 그의 자화상을 관찰해 보면 이런 변화를 추적할 수 있다. 



흰색에는 석회를, 청색에는 유리 가루를 혼합하여 독특한 효과를 노렸다. 그의 유화 물감은 복잡한 제조법으로 배합되어 제자들도 그것을 다시 만들 수 없었다. 그나마 입 주변 수염은 촘촘한 편이지만, 얼룩덜룩한 피부, 숱이 거의 빠진 눈썹이 어김없는 노인의 얼굴이다. 반투명 유화를 여러 번 덧칠해서 얼굴에 회색, 흰색, 보라색, 노란색, 분홍색 등으로 표현하였다. 



 밝은 빛을 받는 섬세한 얼굴에 집중하도록 옷과 배경은 빠르고 얇게 칠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았다고 해석하지만, 노인들의 초상화를 그릴 때 필요한 회화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자화상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네덜란드의 선배 화가 렘브란트의 자화상에서 영감을 받아 역시 자화상을 많이 그린 반 고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말년 자화상 세 점을 보면 가혹한 운명에 휘둘린 한 남자의 솔직한 얼굴이 그대로 나타난다.          



가난과 비극이 붓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모피 코트를 입었지만 이젠 털도 윤기를 잃었다.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려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성격이었다. 위대한 예술가는 마지막 자화상을 그리며 자신에게 무어라 위로하고 있었을까?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울고 있다. 이 그림을 보니 완벽하게 자신을 설득하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을 앞둔 이 자화상에서 회한만 남은 렘브란트와 대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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