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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Jul 02. 2024

여름 구름

무릎이 아파 이제 눕자 하면서 김사인의 《시를 어루만지다》를 펼쳐 보니, 이 사진이 나온다. 이젠에도 봤겠지만, 무심히 지나쳤던 사진이다. 저렇게 여름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한없이 피어나면 나도 모르게 “엄마” 하고 부르게 된다. 그리고는 철도 없이 도연명의 “하운다기봉(夏雲多奇峯)”을 생각한다. 여름 구름이 기묘한 봉우리들을 많이도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시를 어루만지다》는 김사인이 시를 뽑아 짤막한 해설(나는 이런 방식이 시 해설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을 덧붙이고, 사진작가 김정욱의 사진을 군데군데 실은 책이다. 이 멋진 사진은 대체 어떤 시와 맞물려 있나 앞장을 열어 보니, 마종기의 〈여름의 침묵〉이다. 아 제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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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철 혼자 미주의 서북쪽을 여행하면서

다코다 주에 들어선 것을 알자마자 길을 잃었다.

길은 있었지만 사람이나 집은 보이지 않았다.

대낮의 하늘 아래 메밀밭만 천지를 덮고 있었다.

메밀밭 사야의 마지막에 잘 익은 뭉게구름들이 있었다.

구름이 메밀을 키우고 있었던 건지, 그냥 동거를 했던 것인지.

사방이 너무 조용해 몸도 자동차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내 생의 전말같이 무엇에 홀려 헤매고 있었던 것일까.

소리 없이 나를 친 바람 한 줄을 사람인 줄 착각했었다.

오랫동안 침묵한 공기는 무거운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것,

아무도 없이 무게만 쌓인 드넓은 곳은 무서움이라는 것,

그래도 모든 풍경은 떠나는 나그네의 발걸음이라는 것,

그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무슨 남자냐고 메일이 물었다.


그날 간신히 말없는 벌판을 아무렇게나 헤집고 떠나온 후

구름은 다음 날 밤에도 메밀밭을 껴안고 잠들었던 것인지,

잠자는 한여름의 극진한 사랑은 침묵만 지켜내는 것인지,

나중에 여러 곳에서 늙어버린 메밀을 만난 공손히 물어도

그 여름 황홀한 뭉게구름도, 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면벽한 고행 속에 그 흔한 약속만 매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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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의 말대로 “마음의 먼 곳을 거쳐서 나온 것이 틀림없는 호명과 형언들”이다. 오늘 밤은 이 시와 사진 한 장으로 잘 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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