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게 방과 후 강사를 시작하게 됐을 때 문화센터에서 경험과는 다른 시스템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문화센터는 강의만 하면 되었고 홍보나 회원 관리를 신경 않아도 됐다.
그러나 방과 후 강사로 일하면 학교에서 수업을 운영하는 것 외에도 홍보, 학생 및 학부모 관리, 문서 작성 등 다양한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적응하는 1년 내내 학교 수업에 늦는 악몽을 꿨을 정도로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그럼 어디에 물어보면 되지 않느냐? 고 하겠지만 학교 시간표에 맞춰 수업을 운영한 후에는 동료 강사들과 친해지기 어려웠고, 여유로운 대화를 나눌 시간 또한 없었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에서 혼자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엎친데 엎친 격으로 문화센터에서는 1~2명 했던 인원이 점점 10명, 30명씩 증가하는 반면 방과 후 수강생은 오히려 줄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실력을 올리기 위해 노력하는데 '재수강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문자를 받을 때마다 서운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머지 재수강해준 아이들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만둔 아이들만의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때, 현재의 남편이 속상해하는 나에게 '너를 믿고 남아준 아이들을 위해 힘내'라는 말에 정신이 번뜩 들 수 있었다.
사진: Unsplash의Artem Kniaz
문화센터처럼 아이들의 실력을 높이는 강의 방식은 방과 후 수업에 맞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업으로 예를 들어본다면,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모른 상태로 떡볶이 집을 차렸는데 자꾸 파스타만 주는 격이었던 것이었다.
그때부터 방과 후 강의를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먼저, 방과 후 수업은 문화센터와 어떤 점이 다르길래 똑같은 수업인데 이렇게 차이가 날까?부터 시작했다.
방과 후 수업은 학교 정규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방과 후에 자신이 선택한 강좌를 듣기 위해 모이기 때문에 시간이 고정적이다.
반면 문화센터는 강사의 스케줄에 따라 시간을 정할 수 있다. 그리고 문화센터 수업은 주말, 저녁시간이든 '강의'를 듣기 위해 학부모님의 시간과 노동력도 같이 동반된다. 방과 후는 학교 내에서 아이들이 이동하기 때문에 이 점은 자유로운 편이다.
이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문화센터는 학부모님이 아이들의 하고 싶은 것을 해주기 위해 시작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학부모님이 직접 검색하고 입소문에 의해서 찾아온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실력의 향상을 선호했으며, 아이들이 흥미가 없어도 학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에 반해 방과 후 수업은 돌봄의 의무가 우선이다. 아이들이 수업을 잘 듣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는 학부모님을 대신해서 출결관리에 신경을 써야 하며, 학생들의 '선호도'가 우선이다.
사진: Unsplash의Daniela Holzer
이를 모르고 처음에 했던 강의 방식으로 진행하니 아이들의 실력은 좋아졌으나 흥미를 잃고 떠나는 일이 많아졌고, 매번 집에 와서 수업에 대한 자책을 했다. 내가 간과한 것은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 하는 것이었다.
강의 방식도 그에 맞게 유연하게 바뀌어야 했다. 문화센터에서 통했던 방식만 고집했고, 사계절을 지나고 나서야 방과 후 시스템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학생들이 점차 많아지자 이름과 진도를 전부 기록하고 외우면 개인별 맞춤 수업으로 진행했다. 같은 강의를 해도 개인마다 진도 차이가 있다.
물론 학년에 맞게 같은 교재를 지급하기만 하면 편한 일이지만, 아이들에 맞게 적절한 교재를 선택하고 보조 학습지를 준비하는 이유는 나의 학창 시절에서 비롯됐다.
사진: Unsplash의Joshua Hoehne
나 역시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반에서 꼴찌를 했고, 학습 부진으로 보충 수업을 진행했다. 왜 처음부터 이렇게 쉽게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평균이라는 것은 누가 정한 것일까?라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과학 특성화 학교였는데 수업시간만 되면 유독 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점수로 사람을 판단했다.
80점 미만인 학생들은 자신의 이마에 과학 점수가 적힌 종이를 붙이고 벌을 서듯이 뒤에 서있어야 했다.
물론 나 역시 항상 뒤에 서 있었고 당시 선생님을 매우 무서웠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내가 '선생님'이라고 불리게 된 이상 절대 아이들을 점수로 판단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이들이 수업을 듣는 동안에는 못하는 것이 창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어려웠던 부분을 깨달았을 때 격려했다. 그런 진심이 통했을 때는 한 학부모님과의 통화였다.
'아이가 주산 선생님은 틀려도 혼내지 않는데, 엄마는 왜 혼내냐고 해요'
사진: Unsplash의Philippe Bout
처음 과외와 문화센터에서 번 수입은 20만 원이 전부였다. 그 후 방과 후 수업을 운영하면서 재수강을 늘리기 위해 문화센터에서 했던 강의 방식을 계속해서 변화시켰다. 월급이 5번 입금된 것을 모두 합산해 보니 당시보다 20배가 넘었다. 강좌는 몇 초만에 마감이 되고 대기 명단까지 생겼고, 월~토요일까지 가르치는 학생이 200명이 넘기 시작했다.
유년시절 돈 때문에 힘들었던 경험 때문에, 나 자신의 가치를 정의하는 방법은 '돈'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잘하는 것을 더 잘하기 위해 수강생을 높이는 방법을 찾았고,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경험을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는 겪게 해주고 싶지 않아서, 성적보다 수강생들의 마음에 공감했더니 내가 원하는 목표 수익보다 더 많이 벌 수 있었다.
혼자서 하는 일은 누군가에는 적성에 맞지 않을 수 있고, 해답이 없는 일을 혼자 푸는 일의 연속일 것이다.
각자의 경험에서 비롯된 방식들이 존재하고 그 문제에 적용했을 때 답이 다르게 나올 수 있다.
돈을 벌고 사는 것에 정답이 모호해지는 시대이다. 정답이 없는 만큼 푸는 방식도 다양해지고 있다.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보면, 누구나 원하는 삶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