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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naC Nov 26. 2016

기억을 추억으로 만드는 법.

그림으로 공감하기

컴퓨터가 연기를 풀풀 내며 고장이 났던 날,

꼭 필요한 부품이 생겼다.

부품 박스는 분명 방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확신을 하며

작디작은 내 방을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고

결국엔 창고를 뒤질 수밖에 없었다.


내 방엔 작은 베란다가 딸려 있는데 평소에 잘 쓰지 않는 가족들의 온갖 물건들을 모아두는

창고 같은 역할을 한다.

여름 내내 아껴주던 선풍기는 최근에 그 안으로 들어갔고

아빠의 낚시 가방이라던지 여름 한정 아이스 박스 같은 것들을 모아두는 그곳.

물론 내 짐도 있어서 혹시나 그 안에 있을까 싶어

그렇게 동굴 못지않은 창고를 털어보기 시작했다.


부품 박스는 못 찾았고 대신 찾게 된 건 큰 사과 박스 하나.

그래, 찾은 김에 오래전에 마음먹었던 일,

이 박스를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릴 적 다니던 학원의 국어 선생님은 이름도 얼굴도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단 하나 기억나는 게 있다면 그 분만의 기억을 추억으로 만드는 법이었다.

편지나 일기 같은 추억의 요소들을 잘 읽어서 마음에 담아두고

잘 태워서 자신만의 영원한 추억으로 정리를 시킨다고 하였다.


어린 맘에 그런 방법이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해서 언젠가 한가득 추억이 쌓이면

그런 식으로 아름답게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고

크고 단단한 사과 박스에 어린 시절의 추억을 모아두게 되었다.


초등학생 시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친구들과 교환하던 카드도 있고 크리스마스 씰도 있다.

전학 오기 전 친구들과 주고받던 편지도 있고

새 학교가 낯선 나에게 편지 친구가 되자며 한가득 편지를 써주던 친구의 흔적도 보이고,

졸업하던 날 받았던 친구들의 롤링 페이퍼도 잘 가지고 있다.


노트 한 장 죽 뜯어 꼬깃거리게 접어 있던 쪽지는

나를 정말 좋아한다는 삐뚤빼뚤한 글씨의 연애편지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던지

소설가가 되고 싶어서 썼던 글이 아주 아주 아주 아주 부끄럽게 남아있어 열자마자 덮어버렸다.ㅋㅋㅋ

중학교를 다니면서는 본격 만화가를 꿈꾸며 친구들과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그때 즈음엔 연습장에 만화 연재(?)를 시작.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렸던 어설프고 열정 많던 시절의 꿈도 이 사과 상자 안에 있다.


좋아하던 친구들과는 교환 일기를 썼고

시시콜콜하고 별거 아닌 이야기를 언제나 알록달록하고 예쁘게 쓰려고 노력했다.

이 교환 일기는 꽤 오래 썼는데 뒤로 갈수록 사춘기가 와 중2병을 달고 있어서 더 부끄럽다.

월드컵 때 잔뜩 모았던 축구선수들의 기삿거리와 사진들,

좋아하는 공연을 갔을 때 함께 찍은 사진들.

학교 합창대회 때, 수학여행 때 찍은 단체 사진들부터

디카도 없던 시절 필름 카메라로 사진 찍고 인화할 때 친구들의 주문을 받느라

사진 뒤에 친구들 이름이 선명하다.

좋아하던 가수의 브로마이드부터

"ㅋㅋㅋㅋ"란 표현이 생기기 전이라 "아 너무 웃겨;;" 정도로 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친구들과의 MSN 메신저 대화를 복사해 놓은 프린트 물.

동기들 군대 가면 고생 많다고 편지 한 번씩은 꼭 써주었는데 그때마다 받던 답장 편지들까지.


나의 추억은 퍽 아름답고  묵직하다.






사실은 그 추억들을 하나하나 보기 시작한 순간부터

버리고 싶은 마음은 저 멀리 사라졌다.


그냥 좀 아까웠다.

나만의 추억으로 간직하기 위해 일부러 없앤다는 건 보통의 용기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고대의 왕들이 이 같은 마음을 먹었다면 후세에 남을 것도 없었겠지- 싶다.


그래서 보류.

아직은 눈에 담고 손에 담고

이 사과 박스에 다시 담고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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