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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룸펜 Nov 13. 2023

결못남 일기(04) - 옷

브론즈-솔로-인생



# 혼자서 해내야 하는 일 중에서 바지 길이를 알맞게 줄이는 것만큼 난감한 게 없다. 수선실에 맡기기 전에 스스로 적정 위치를 잡는 것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게다가 바지라는 것 몸의 미묘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괴상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다. 자신의 체형에 맞는 바지를 발견하는 것부터 구입 후 다리 길이에 딱 떨어지게 수선하는 것까지, 이 대장정을 생각하면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다.


  나는 100퍼센트의 바지는 아니어도, 92퍼센트 정도의 기성복 브랜드를 오랜 시행착오 끝에 몇 군데 찾아 놨다. 이 때문에 혼자서 쇼핑몰에 가서 “바지 입어보려고요” 따위의 을씨년스러운 대사를 중얼거릴 필요가 없어진 거다. 보여줄 사람도 없는데 피팅룸에서 혼자 갈아입고 나오는 일련의 행위가 갑자기 우스웠다. 그 뒤로는 혼자서 쇼핑가는 일이 없다.


  어쨌거나 바지를 줄여야 하는 시점이었다. 인터넷으로 진작에 주문해 둔 겨울 바지를 꺼내 들었다. 과거의 나를 믿는다면 똑같은 브랜드의 입던 바지를 하나 더 들고 가면 될 일인데, 나는 과거의 나를 더는 신뢰하지 않는다. 그저 멱살 잡고 싶은 상대일 뿐이다.


  그래서 바지 세 벌을 들고 수선집에 찾아갔다. “이 바지는 그 바지와 같은 브랜드, 같은 라인의 바지인데 말이죠. 전혀 다른 브랜드의 저 바지가 길이감이 마음에 드니까 그렇게 맞춰주세요.” 새로 발굴한 수선집의 아저씨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까다롭게 요구하는 남자를 대하는 표정만 봐도 나는 그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날 바지를 찾아왔다. 이어서는 세탁이다. 맨살에 닿는 옷은 세탁해서 입는 습관을 유지해야 한다. 15년 전에 본 미국 드라마 <하우스>의 어떤 에피소드에서 배우게 된 지식이다. 청바지를 손세탁하라는 세탁라벨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팔을 부들부들 떨며 해냈다. 그리고 출근길에 드디어 바지를 개시했는데, 주문 시점의 나 자신보다 1인치가 말라 버렸음을 깨달았다. 아…




# 취미가 무어냐는 질문에 이어서 답변해 본다. (혼자서) 걷기, (혼자서) 재즈 듣기, 그리고 비싸지 않은 옷을 계속해서 (혼자서) 사는 행위. 이 세 가지는 분명히 취미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른 분이 자신의 요즘 취미는 ‘지도 앱에 맛집 리스트를 저장해 두는 일’이라고 밝혔다. 언젠가 도장 깨기용으로 저장해둔 것이라고 했다. 공유받은 십여 개의 음식점을 살펴보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들이었다.


  나에게는 이미 100개가 넘는 맛집 저장 목록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장소에 방문한 일이 없었다. 언젠가 가야지, 누군가와 가야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저장해둔 곳들이다. “저는 100개 넘게 있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런 게 뭐가 자랑이겠어. 역시 나는 평생 준비만 하는 남자…




# 원치 않는 저녁 회식 자리에 끌려갔다. 옆 부서의 누님께서, 너는 어떻게 깔끔하게 하고 다니냐고, 남자라면 빈틈이 많은데, 그러니까 보통은 결혼해야 비로소 여자가 관리해 줘서 단정해지는 건데, 너는 왜 깔끔하냐며, 나에게 칭찬 반 따지기 반으로 물었다.


  “결혼 못 한 남자가 깔끔하지 않으면 욕 듣기 아주 딱 좋거든요.”

  모두가 웃었다. 그리고 나는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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