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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룸펜 Nov 07. 2023

결못남 일기(03) - 수면제

브론즈-솔로-인생



# 처음으로 수면제를 처방받았다. 수면 장애를 오래도록 앓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이다. 나에게는 심리적 장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정신과 상담을 받지 말아야 한다, 따위의 이상한 고집이 있었다. 소위 말하는 ‘마음먹기에 달린 것’을 약물에 의존하는 것에 저항감이 있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신체의 물리적 아픔에 관해서는 각종 치료와 약물에 의존하는 ‘프로 환자’인 내가, 어째서 심리적인 부분에 한해서는 그렇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밀었는지 이해하지 못 하겠다.


  새로 찾은 병원에서 의사가 나의 이런 장벽을 허물어버렸다. 현재 받는 질병의 치료 중 하나가, 정말 오랜 시간 차도가 없었다. 잠부터 잘 자는 게 우선순위인 것 같다며 수면제를 권했다. 수면제를 시작하면 이것이 매일 필요한 사람이 될까 겁나서 그동안 한 번도 수면제를 먹을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제가 수면제에 의존하는 사람이 되진 않게 해주세요.”


  하지만 지금 정도로 잠을 못 자는 것은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닌 것 같다고 의사는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약한 것을 처방하겠다며 ‘스틸녹스’라는 것을 2주 치 줬다. 첫날은 무려 7시간을 잘 수 있었다. 두 번째 날은 6시간, 세 번째 날은 5시간, 네 번째 날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분명히, 잠이 드는 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중간에 깨는 것 때문에 힘든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 수면제가 그것에 맞게 작용하는 기전은 아닌 것 같았다.




# 취미에 관해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미적 감각은 있지만 미술적 재능은 없다. 판단하고 고를 수는 있지만, 실제로 내가 미적인 무엇을 생산하는 능력은 부재하단 뜻이다.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 글에 삽입하는 이미지를 직접 그린 것 아니냐는 질문에, 내가 지시하고 그림은 AI가 그렸다고 대답했다. 악기도 다룰 줄 모른다. 나는 악보라는 것의 작동 개념을 이해 못 해서 고등학교 때는 계이름을 통째로 외워서 시험을 보곤 했었다.


  언젠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는 왜 미술 학원 안 보내줬어요? 그리고 나는 할 줄 아는 악기가 왜 하나도 없어요?”


  “다 보내봤어. 다 시켜봤던 거야. 너는 재능이 전혀 없었어.”


  학원을 다녔던 기억도 하지 못 하는 멍청이라니, 다 큰 어른인 나는 엄마의 말을 믿지 못 하고 스스로 피아노 학원등록다. 그리고 세 달 만에 포기했다. 엄마 말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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