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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룸펜 Sep 30. 2023

결혼시장을 여행하는 노총각 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거기 노총각 씨,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하고 발걸음이 가벼워진 행색을 보아하니 혹시 지금 결혼정보회사(이하 결정사) 서비스에 가입하고 오는 길입니까? 그리고 옆에서 서성이는 또 다른 노총각 씨, 당신은 보아하니 무얼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얼굴이군요! 모두 잠시 여기로 와서 제 얘기를 들어보십시오.


어디부터 말씀드리면 좋을지…… 네? 아차차,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로 말할 것 같으면 결정사 고인물 노총각입니다. 당신들은 아직 모르시겠지만, 노총각에도 초보와 고수가 있지요. 슬프게도 말입니다. 어쨌거나 당신들처럼 초보 노총각으로서 망망대해와 같은 혼활 시장에 뒤늦게 뛰어들었다면 알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들려드릴 것은 당신들께서 알아 두면 도움이 될 정보입니다. 이 무간지옥에 먼저 입장해 고생한 선배의 충고로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무한한 동료애를 갖고 당신들 노총각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가이드북입니다.



~~~ 안내서 제1편: 매니저와 당신의 가치에 관하여 ~~~


결혼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결심을 내린 당신은, 아마도 자연스럽게 결정사라는 전통의 업체에 찾아가 이미 등록을 마쳤거나, 혹은 가입을 고민 중인 상태일 것입니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몇 군데에서 선택하셨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대형 결정사들의 경우 ‘가입 상담 매니저’와 ‘커플 매칭 매니저’는 완전히 분리되어 운영되는 구조라는 점부터 알려드려야겠군요. 그렇기에 이 둘은 매니저라는 호칭만 공유할 뿐 실제로는 성과 목표도 다르고, 행동 전략도 다릅니다. 이에 따라 서비스 이용의 단계별로 당신의 경험이나 기분은 천차만별로 달라지게 됩니다.


상담 매니저의 성과 목표는 당신이란 ‘매물의 확보’입니다. 감언이설로 당신을 고평가하고, 기분 좋게 만들지요. 당신이 고액 고품격 서비스의 이용에 합당한 사람이란 확신(또는 착각)을 심어주고, 가입 계약의 작성에 다다르게끔 만드는 것이 행동 전략입니다. 즉 신규 회원의 유치! 그것에 탁월합니다. 그 방증으로, 결혼 못 하고 방황하던 당신이 납치당하듯 정신이 홀려 여기까지 온 것이지요.


― 이제는 결혼도 전략적으로 접근하셔야 합니다.

― 본인께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시니, 역시 그럴 만한 상대를 찾기 위해 투자하는 거죠.

― 우리 회원 중에 지금 말씀하신 조건의 여성 분들 많이 계십니다.


당신을 포섭하기 위해 어떤 말이든 내뱉던 것을 기억할 겁니다. 혹시 아직도 그 사탕발림과도 같은 말들에 취해 있다면, 아 물론 당분간은 그 기분에 취해 있어도 좋습니다만, 정신차리고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시점이 조만간 도래합니다. 현재로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지요? 걱정 마시길, 이 단계부터는 커플 매니저가 당신의 깨우침을 도와줍니다.


커플 매니저의 경우 두 가지 유형이 존재합니다. 성혼 사례금(실제로 결혼이 성사되었을 경우에 지불하는 성공 보수)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행동 패턴은 달라집니다(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성혼 사례금이 있다면야 성과 목표는 명백하겠지요. 될 법한 남녀 매칭의 주선! 반면에 성혼 사례금이 존재하지 않는 구조라면…… 이 또한 명백하지요. 이럴 경우 커플 매니저의 성과 목표는 ‘빠른 소진’이라고 여겨집니다. 퇴물 용사 당신을, 돌아오지 않을 인생의 최고점을 추억팔이하며 자신의 값어치를 고평가하고 있는 당신을, 합리적인 (어쩌면 초초급매) 시장가격으로 팔아치워야 합니다. 테이블을 빠르게 돌려야 합니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동 전략은 감언이설뿐만이 아니라, 당신을 어르고 달래고 협상하고, 때로는 정신적으로 쥐어 패버리는 것입니다. 즉 당신이 지불한 비용만큼의 서비스를 신속하게 소진하는 것이죠. 그리고 역시, 될 만한 만남을 주선하는 것! 이를 통해 빠르게 성혼시키든, 아니면 추가 비용(재가입) 결제를 시키든 하는 겁니다.


― 왜요? 이분이 어때서요? 제.가.보.기.에.는. 우리 회원님이랑 잘 맞는 것 같은데요?

― 이 정도는 감수하셔야죠. 어떻게 모든 조건을 다 맞춰드려요? 그런 사람이 존재할까요?

― 매니저가 고심해서 세 명이나 제안해드리면 한 명 정도는 만남 수락해주시는 게 일종의 매너죠.

― 회원님 이제는…… 조건을 현실적으로 조정하지 못 하시면 결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늦어집니다.


이 어찌나 냉정한지! 실용주의의 화신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내가 그래도 그간 만났던 여자 수준이 있는데!’라는 이제는 증명 불가능한 추억의 미화라든지 자존심의 억지라든지 때문에, 이만한 돈을 내고 이런 상대를 만나러 왔다는 슬픈 현실이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뭐…… 제가 그랬으니까요. 신입생들에게 예상되는 반응의 패턴들이란 뻔합니다(그것에 대한 대처 방법들도 이미 다 준비되어 있는 거죠). 처음에는 말도 안 되고 분노도 하고 탈퇴도 고민하고 여러 고뇌를 겪게 될 겁니다. 그런데 참으로 귀신 같은 것이…… 분노해서 환불하고 싶을 때 쯤이면 또 적절하게 괜찮은 사람을 한 번씩 보내줍디다. 이것이 커플 매니저의 운영의 묘수랄까요. 이런 식의 당신과의 밀고당기는 심리게임이 서비스 내내 지속됩니다. 당신 안에 존재하는 이상형의 기준을 조금씩 조금씩 낮추어 갑니다. 모래사장에서 깃발을 꽂아두고 모래를 조금씩 가져가는 게임 기억하시는지요? 오가는 요구와 타협으로 조금씩 조금씩 당신의 기준을 침몰시켜…… 결국엔 함락시키고, 이 정도면 이게 나의 (현실적인) 이상형이다! 믿게끔 만드는 그런 일련의 작업을 당신께 걸어버리는 겁니다.


뭐 그런데 말이죠. 이런 전략에 당해버리는 것이 나쁘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결혼이란 것은 아직 저도 달성하진 못 했지만, 어쩌면 이런 콩깍지라든지 무언 가에 속아버리는 게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올해 소개받는 그녀들은, 높은 확률로 내년에는 소개받지 못할 조건의 그녀들이 되어버립니다. 쉽게 말해서 여자 못지 않게 당신이란 남자의 값어치도 현재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는 거지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남자라고 해서 특별히 다르지는 않은 것 같더란 말입니다. 네? 그럴 리가 없다고요? 남자는 와인이니까, 나이가 크게 걸림돌이 아니니깐, S급 여자가 나올 때까지 ‘존버’하시겠다고요? 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런 전략을 취할 수도 있지요. 분명히 가능한 얘기입니다만……. 저의 경우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더라고요! 물론 제가 부족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요. 저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산적으로는 가치가 제법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초반부에 만났던 분들이 가장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저를 좋다는 분들과 적당히 오케이 하고 진행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연말연초면 한번씩 해봅니다. 게다가 당신이 접근 가능한 연령과 조건의 좋은 상대방”이란 것은 이 시장에서 순식간에, 아주, 아주, 빠르게 사라진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둬야 합니다. 이 무간지옥과도 같은 시장에 있는 자들은 남자건 여자건 빠른 탈출을 바라마지 않는 처지라는 것도 이 품절 현상의 가속화에 한몫 하지요. 그러니 결국은 남자도 젊음의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네? 이렇게 말하는 제가 결정사를 얼마나 해봤냐고요? 결정사 이용이 햇수로만 4년 차입니다…… 맙소사, 스스로 돌이켜봐도 끔찍하군요. 하지만 저는 지옥에서 웃는(웃게 된) 자입니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의도치 않게도 결정사를 이용하는 사람들 간에도 다소간의 친목이 생겨서 귀동냥하는 정보 또한 많아졌고요. 덕분에 이런 이야기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만…… 그런데 말이죠. 자세히 밝혔더니 역시 부끄럽네요. 그런 관계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작성해둔 메모를 읽어 보시고, 궁금하다면 다음에도 찾아와 주시든지 말든지 하시길 바랍니다.


- 안내서 제2편에서 계속……




# 그리고 노총각 선배가 남기고 메모들

1. 성혼 사례금이 있든 없든 결정사마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한 번에 여러 결정사를 복수로 가입해서 이용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존재한다.

2. 일반적인 서비스의 경우 커플 매니저가 마음에 안 든다고 여러 차례 바꿔 봤자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매니저와 회원 간의 궁합은 있을 수 있지만…… 커플 매니저는 공동의 회원 풀에서(매니저마다 풀이 다른 구조가 아니라면) 당신에게 매칭 작업을 해줄 뿐이지 그 여성의 마음을 홀려다 주는 역할이 아니므로 누가 되든 무차별하다는 생각이다. 상담 목소리의 차별 정도는 존재하겠다.

3. 잘 모르겠다면 재산이나 가족의 정보에 대한 입력은 최소한으로 기재하고 가입해도 무방하다. 정보가 더 필요하면 매니저가 당신에게 연락할 것이다.

4. 결정사에 훈남훈녀도 물론 존재한다. 내가 못 만날 뿐이다.

5. 코로나19로 인하여 결정사들은 초호황기를 맞았다. 현실에서의 자만추가 극단적으로 힘들어졌으므로 예전 같으면 결정사 가입을 안 했을 사람들도 이곳에 유입되었다. 이전보다 회원 풀의 다양성이나 수준이 전반적으로 올라갔다고 느껴진다.

6. 상대방의 프로필에 재산을 얼마 갖고 있다는 내용은 절반쯤은 걸러 듣는 게 이롭다.

7. 미차감 만남이라는 개념이 있다.




P.S.  예전에 써둔 글을 워드파일에서 찾았기에 게시해봅니다. 작성 내용은 2020~2021년쯤의 기준입니다. 뭐… 그 시절 생각도 나고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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