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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랑 Dec 18. 2022

다 지겨웠고, 다 행복했다

밥벌이로서의 사교육 이야기 #17 (끝)

[다 지겨웠고, 다 행복했다]


마지막 출근을 마쳤다. 10여 년에 걸친 학원 생활을 그만 두기로 했다. 감회가 남다를 줄 알았다. 그래도 인생의 한 꼭지를 마무리한 것인데. 지금은 그냥 이런 생각이 든다. 다 지겨웠고 다 행복했다.


 학생들은 언제나 어렸고 나는 조금씩 나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 사실을 매일 마주해야 하는 것이 너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는 매일 성장하는데 나는 몇 년을 똑같은 얘기만 하고 있구나. 학생들이 너무 예뻐 보이는 날이면, 질투에 몸서리쳤다. 학생들은 앞으로 망칠 시험들을 걱정했지만, 나는 이미 망쳐버린 인생의 시험들을 수습하며 살고 있었다. 가끔은 정작 나는 살아내지 못한 건강한 청소년기를 너희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면, 내가 하는 일이 고작 청소년들을 괴롭히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울적하여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래서 매년 별반 다르지 않은 청소년들을 볼 때마다 이 직업이 한없이 지겹게 느껴졌다. 나는 올해도 똑같은 얘기를 할 것이고 똑같은 데서 분노하며 똑같은 데서 좌절하겠지. 근데도 이 일을 왜 계속 하냐고 누가 물을 때면, 먹고 살기 위해 이 일을 한다는 핑계는 언제나 적절하고 간명했다. 그러나 먹고 살 길은 이것 말고도 많으므로 먹고 살기 위해서만 하는 일은 분명 아니었다.


 이 사회에서 청소년을 묘사하는 말들은 너무 투박하다. 자신들의 정치적 취향과 맞는 행동을 하면(촛불 or 태극기) 그들을 대한민국의 희망 쯤으로 부르다가도 어느 순간엔 어른들의 인권을 죄다 박살내는 범죄자로 묘사한다. 물론 내가 겪은 청소년들은 그 둘 모두였다. 내 앞에서 성소수자를 욕하고, 장애인을 멸시하고, 여성혐오를 일삼고, 학교 선생들을 희롱하면서, 내게 깍듯이 예의를 지켰다. 그런 예의바른 비행청소년들을 보다보면 세상의 혼탁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도대체 뭐냐. 아, 너희들은 이미 우리가 만든 지옥에서 살고 있었지.


 손쉬운 훈계에 비해 변화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건 지루한 일이다. 몇 마디 훈계로 청소년들에게 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의 얄팍함이 결국 세상을 이리 만든 것이다. 그러니 청소년들을 만난다는 건 혼잡한 이 세상을 마주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행히도 나는 그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기에, '청소년'은 그저 이름이 아니라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고1이었던 A는 쉬는 시간에 '카를 되니츠' 평전을 읽었다. '내가 롬멜이나 만슈타인 좋아하는 학생은 봤는데 되니츠 평전 읽는 학생은 첨 보네요. 어디가 좋아요?'라고 물었더니 '잠수함은 멋지잖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잠수함처럼 조용히 그러나 꾸준하게 학원을 나왔다. 다만 성적 역시 잠수함마냥 좀처럼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B는 내 블로그를 너무 열심히 읽었다. 내가 '심상'을 설명할 때마다 '대표님?'이라고 반문하던 학생이었다. 험악한 외모의 소유자였으나 어울리지 않게도 내게 순종적이었다. 드립은 아슬아슬했지만 무사히 대학생이 되었다.

 C는 늘 빽다방에서 만났다. 나를 볼 때면 한결같이 담배 피다 걸린 학생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끝끝내 자신의 흡연을 부정했지만 라이터 좀 빌려달라는 말에 순순히 내게 라이터를 빌려주는 것으로 자신의 흡연을 증명해보이고 말았다.

 D는 체대를 지원하려는 재수생이었다. 누구보다 착했고 누구보다 성실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잤다. 일요일에는 나와 9시간을 함께 수업했다. 그의 잠을 깨우는 것으로 나는 일요일을 마감하곤 했다. 수능치고 그가 가져 온 홍삼은 끝내 다 먹지 못했다.


 말하지 못한 더 많은 학생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이름은 바래지기도 했으나 이야기는 여전히 남아 있다. 기백명의 인생과 함께 할 수 있었던 행운을 앞으로 내가 무슨 수로 누릴 수 있을까. 그건 분명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존재'로 만날 수 있었던 덕분에, 나는 많은 이름 뒤에 숨겨진 존재들을 떠올려볼 수 있었다. '학원'이라는 안온한 곳까지 도달할 수 없었던 청소년들에 대해서도 감히.


 이런 생각들을 하며 이번 주를 보냈다. 처음 내게 학원은 제 글을 쓰지 못한 자들의 무덤이었다. 나는 내게 허락된 사회적 능력이, 나의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남의 똥을 닦는 것에 그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지겨웠고, 그래서 행복했다. 남의 똥을 닦는 것에 지나지 않는 거라 생각했던 그 일은, 무수한 청소년들과 함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었고 나의 20대는 그렇게 하나의 글이 될 수 있었다.


 학원 내의 알력 다툼에 대해선 굳이 언급하지 않으련다. 어차피 어른들만의 일이다. 모두가 생각하는 것만큼 비루하고 쓰잘데기 없었다.


 마지막 출근을 마쳤다. 무덤이라고 생각했던 곳을 박차고 나왔다. 생각해보니 차라리 그곳은 내게 요람이었다. 세상을 마주하기 위한 능력을 기른 곳이었다. 그런데 요람을 이리 나와버렸으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할까 고민했는데 떠오르는 문장은 결국 이것 하나뿐이다. 이제 또 다른 글을 써야겠다.


#밥벌이로서의_사교육 (17) 끝.


*

이 시리즈는 이제 정말 끝났습니다.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는데, 어쨌거나 무언가를 마무리했다는 사실에 우선은 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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