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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 Feb 26. 2024

문학으로서 삶

각자의 이야기

나도 그분처럼 그렇게 자유롭게 , 그렇게 거룩하게 그렇게 사람 눈에 띄지 않게, 그렇게 당당하게, 그렇게 순진무구하고 신비스럽게 , 바라 보고, 미소 짓고 ,
앉아 있고, 걸을 수 있었으면 정말로 좋겠다.
자기 자신의 가장 내면적인 곳까지 들어간 사람만이
그렇게 진실하게 바라보고 그렇게 걷는 거야.
나도 나 자신의 가장 내면적인 곳까지 뚫고 들어가 보도록 애써 볼터이다.

그분은 나에게 싯다르타를 ,
나 자신을 선사해 주셨다.

<헤르만 헤세 , 싯다르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세기 12:1>



1. 스스로의 이야기


인간은 이야기를 따라서 걸어간다. 그러기에 인간은 문학 속에서 거주한다. 그 이야기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보편적인 하나의 신화로 구성된다. 오래된 전통의 신화들. 서양에서의 기독교와 동양에서의 불교가 이를 대표한다. 사회는 이러한 이야기들의 합이다. 사회는 각 개인이 믿고 있는 이야기 총체적 산물인 동시에. 그 이야기를 다시 한번 재생산하고자 하는 권력의 구조물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신화는 '신자유주의적 자기 계발과 성공의 신화'이다. 인간과 사회는 서로 관계 맺는다. 사회는 각자와 관계 맺으며 각각의 고유한 이야기를 통일시키려 한다. 한 개인은 두려움에 자신의 이야기를 사회에 의탁한다. 우리는 그 속에서 스스로의 자아를 상실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이야기를 잃어버린다.  


나, 싯다르타의 깨달음처럼 인간은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만 온전히 숨을 쉬어가며 살아갈 수 있다. 사회가 제공하는 매력적인 이야기에 스스로의 자아를 빼앗긴 인간은 삶의 여정의 끝자락에서 형용할 수 없는 상실감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가 스스로 자아를 저버렸다는 배반감의 아픔이다.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어렴풋이 깨닫고 있다. 그 이야기의 끝은 씁쓸한 공허감만이 남는 빈 껍데기와 같은 삶이라고.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이야기는 인간 정신의 고유한 유산인 전통의 신화이다. 전통의 신화는 언제나 개인 속에서 피어나는 자아의 여정을 이야기한다. 싯다르타는 스승을 떠나 깨달음의 여정을 나선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가면서 자신만의 여정을 시작한다.



2. 모든 것이 의미를 지니기에.


모든 것은 가고 ,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소생한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꺾이고 , 모든 것은 다시 이어진다.
똑같은 존재의 집이 영원히 지어진다.
<프리드리히 니체, 영원회귀에 대해서>


삶에는 두 가지 순간이 있다. 스스로를 상실해버리고 싶은 만큼의 절망의 순간과. 삶의 모든 나날들이 의미를 가지는 듯 느끼는 기쁨의 순간. 찬란히 빛나는 그 기쁨의 순간을 천천히 돌아본다면. 그것은 삶의 완성의 순간이며. 이 순간을 위해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고통을 뚫고 왔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고통과 기쁨은 하나의 동일한 조각이다. 니체의 깨달음처럼, 과거로부터의 모든 순간이 현재를 향해서 밀어닥친다. 반대로 현재의 모든 순간이 과거의 의미를 재수립한다. 과거와 현재는 단절되어 있지 않고 영원히 상호작용한다.  그러기에 삶의 매 순간이 의미를 지닌다. 그러니 삶은 문학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3. 문학으로서 삶


삶을 사랑하는 일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내면에서부터 피어 나오려 하는 스스로의 이야기를 사랑하는 일. 삶의 매 순간이 , 설령 고통일지라도 의미를 지니기에 영원히 반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 즉 문학으로서 피어나는 삶을 사랑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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