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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 Feb 25. 2024

관계

그래요, 그 망할 놈의 인간관계요.

집단상담의 리더인 C는 나를 보면서 얘기한다. "너는 개소리 좀 하지 마. 네가 친밀감을 이해한다고. 네가 어떻게 친밀감을 이해하냐. 네가 살아온 삶이 있는데." 속으로 심히 발끈한다. '아니 저 개새끼가 나를 몇 번이나 봤다고' 집단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C의 말이 내 정곡을 찔렀음을 통감했다. 그러니 그렇게 발끈 했겠지.


맞는 말이다. 20대 중반까지 히키코모리로 살아온 내가 친밀감을 이해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나는 내가 딱 외로워서 고독사 하지 않을 만큼의 인간관계만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 친밀감과 소속감이 뭔지는 감조차 모르는 사람이다. '뭐 예전처럼 히키코모리는 아니잖아. 번듯하게 사회생활하고.'는 오랜 변명이었고. 그의 지적처럼 인간관계는 내가 오 시간 미뤄온 숙제였다. 그리고 그 반대편으로 일은 내 오래된 도피처였다. 외로우니 워커홀릭이 되고. 워커홀릭이 되면 더 외로워지니 다시 더 워커홀릭이 된다.


나를 돌아보려 과거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최근에 좋은 관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던 여자애는 나에게 "오빠가 이런 사람인지 몰랐어. 왜 이렇게 중학생 같이 미숙해. 독서모임에서 봤던 오빠는 굉장히 프로페셔널해 보였는데."라는 말을 남기며 나를 차고 갔다. 속으로 생각했다. '그건 일이었으니까. 일은 나름 프로페셔널하게 할 수 있고. 우리가 하려던 건 연애였으니까 ' 그 결과로 작년 연말은 언제나 그랬듯 미친 듯이 외로웠다. 20대 후반의 나이가 되도록 연애도 제대로 못하는 상찌질이였다.


주변의 친구들을 둘러본다. 내가 딱 고독사하지 않을 만큼 붙잡고 있던 관계 중 한 명인 S를 바라본다. S도 나와 비슷하게 20대 초반, 자신이 누려오지 못한 인간관계에 대한 울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다르다. 같이 진행하는 독서모임에서 누구 하고나 쉽게 친해지고. 술자리 러브콜에 불려 다니는 인기스타인 S는 이제야 자신의 인간관계 고민을 졸업한 듯 보였다. 그는 사람들 속에서 쉽게 소속감과 친밀감을 느끼고 누린다. 동시에 거의 맨날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면서 유대감을 느꼈던 S하고의 우정이 예전만큼은 아니라는 것을 통감하며 다시 한번 외로워진다.  


슈퍼인싸 기질로. 나의 슈퍼 아싸 기질을 커버 치면서 친해졌던 K도 바라본다. 뭐 K야 늘 모든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고,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가능한 사람이었으니. 그에게 인간관계는 그다지 큰 고민이 아닐 것이다. ( 물론 그는 나의 이런 의견에 심히 발끈하지만) 그가 너무 부러워서 그를 따라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왠지 그처럼 행동하고 다니면 어딘가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웠다. 분위기는 얼어붙었고. 어색해졌다. 그래서 K에게 술을 맥이고.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있다. 너의 인간관계의 능력의 비결이 뭐냐고. 그는 동문서답을 한다. '나도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이 많지. A하고의 관계는 이게 고민이고. B하고의 관계는 이게 고민이고." '아니 그래서 나는 너처럼 어떻게 인싸가 되냐고를 물어봤잖아. 너의 고민은 인싸가 되고 난 후의 고민이지. 인마.' 그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내가 K에게 얼마나 엉뚱한 질문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의 인간관계 능력은 타고남이었지. 오랜 고민의 흔적이 아니었다.'그렇지 고민은 원래 목마른 사람이 우물 찾듯 하는 거지.'


작년 9월 , 첫 회사에 들어가서 3개월의 수습기간 동안 워커홀릭 기질로 나를 불태워 일했다. 이런 나를 바라보면서 사수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한다. '여기서 있을 인재는 아닌데' 왠지 기분이 좋아진 나는 말한다. '사수님도 여기 있을 인재는 아니잖아요. ㅎㅎ' 그는 개발자가 중고 신입으로 이직할 수 있는 마지막 2년 차를 보내고 있었고. 어중간한 중소기업보다는 개발자의 꿈의 직장('네카라쿠배당토야!')으로의 점프를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 그러니 여기에 죽치고서 자신의 시간을 갈아서 개발을 하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그의 개발에 대한 열정과 능력보다는 그가 회사생활 내에서 가지고 있는 관계들이 부러웠다. 그는 회사 내의 인기쟁이였으니.


다시 한번 깨닫는다. 내가 원하는 건 관계이지 커리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오랜 시간 외톨이로 살아온 내가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욕망이었다. 너무 오랜 시간 나 스스로의 욕망을 무시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C에게 연락해. 집단상담을 하나 더 참여하겠다 말했다. 관계를 배우고 연습하기에매우 좋은 장소이니. 이제야 내가 원하는 것을 직시한다. 커리어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관계를 택하기로 한다. 뭐 회사는 굉장히 별로지만. 일단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니. 그 정도면 오케이다.  그리고 그저 힘들 때 몇 번 생각정리를 위해 찾아간 교회의 임원과 초등부 교사를 맡기로 한다. 교회사람들이 맺는 친밀한 관계가 언제나 부러워 왔으니까. 옆에 붙어있으면 뭐라도 배우지 않을까.


나도 이제는 오래 시간 미뤄온 숙제를 직면해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2024년 한 해의 키워드는 '관계'이지 않을까. 방법은 모르겠다. 무식하지만 열정은 넘쳐나니. 그냥 어디에서든 밀어붙여봐야지. 집단상담이든. 교회든. 회사생활이든 관계에 대한 뭐든지 해보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신세 좀 지기로. 어디든 머리를 빼꼼 내밀고. '관계가 매우 미숙하니 , 신세 좀 지겠습니다.' 하고. (마음 같아서는 초보운전이라고 써붙이고 다니고 싶다 X_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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