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 부하를 줄이는자 심리적 안정감을 얻으리니
이전 글에서는 퍼실리테이션과 셀프 퍼실리테이션 차이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조직의 의사결정은 퍼실리테이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셀프 퍼실리테이션에서는 의사결정부터 실행, 평가와 피드백까지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해내야 합니다. 하지만 개인이 이 모든 역할을 누락없이 수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개인이 목표를 세우고 이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왜 어려운지, 그 원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가 Self Facilitation이란 개념을 고안한 것은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었습니다. 인간다운 삶에는 꿈을 가질 수 있다는 속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기억 체계는 과거를 정확히 재구성하도록 진화해온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1] 과거 기억은 왜곡되기도 하고, 일부는 망각하기도 하며, 새로운 해석이 더해지기도 합니다. 뇌는 과거를 회상할 때 사실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그럴듯한 과거를 재구성합니다. 그 이유는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불필요한 정보나 감정을 제거하는 것은 오늘을 건강하게 살아나가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지과학자 데이비드 바드르는 뇌가 이런 방식으로 회상하는 이유는 미래를 예측하거나 구상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식물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동물의 동(動)은 '動: 움직일 동'입니다. 동물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론가 움직이는 개체입니다. 인간과 동물 모두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이동합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동물은 자연 속에서 살길을 모색하는 반면, 인간은 자연이 아닌 인간이 만든 세상에서 살길을 모색한다는 점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또 다른 차이는 인간은 자신만의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100명이 있으면 100개의 인생이 있죠. 아무리 가까운 친구와 동료라도, 한 집에서 함께 잠을 자는 가족이라도 우리는 각자 다른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거창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각자 유튜브 앱을 켰을 때 뜨는 피드도 다르고, 삶의 환경도 다릅니다. 극좌파와 극우파는 대화조차 나눌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기 때문이죠. 그래서 자신만의 방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만의 삶을 진정으로 영위하고 있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잘 살고 있다는 실감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이죠. 그저 되는대로,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 같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생각이 몰려오면 무기력함을 느끼게 됩니다. 나다운 삶을 살지 못하게 막는 요인은 무엇일까요? 그 내면의 원인이 무엇일지 고민해봤습니다. 저는 작업기억(Working Memory)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에서 많은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살면서 전등을 교체할 일이 없었는데,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온 뒤로는 1-2년에 한 번씩 화장실 전등을 교체하는 것 같습니다. 불이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릴 때마다 스위치를 끄고 켜는 저를 발견합니다. 웃기기도 하지만 멈출 수 없습니다. 습관을 막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전등이 고장났음에도 불구하고 불을 켜고 끄지 않으려면 의식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행동을 구분하자면, 자동 반응과 의식적인 반응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상정지 체계가 있습니다. 비상정지 체계는 뒤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의식적인 행동을 하려면 목표, 해야 하는 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맥락을 보관하고 의식적인 행위를 관장하는 곳이 작업기억(Working Memory)입니다. 인간의 성장 과정은 이 작업기억을 이용하여 의식적인 행위를 반복하고 교정함으로써 자동화된 행동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숙련자나 장인은 의식하지 않고도 자신의 분야와 관련된 행동을 즉시 실행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죠. 작업기억 덕분에 우리는 발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염두에 두어야할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작업기억의 용량이 매우 작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손에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에는 메인 저장소(SSD)가 있습니다. 용도에 따라 적게는 256GB부터 수 TB까지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스마트폰에서 앱을 실행시키면 CPU가 SSD에서 앱과 관련된 데이터를 바로 불러오지 않습니다. SSD보다 속도가 빠른 임시 저장소에 데이터를 올려놓고 사용하는데, 이곳을 RAM이라고 합니다. SSD 용량보다 RAM 용량이 적은 이유는 비용과 효율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억저장소는 SSD에, RAM은 작업기억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뇌 기억 용량은 약 1페타바이트(Petabyte = 1000 TB) 정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2] 1PB는 전 세계 인터넷 웹페이지 총량과 맞먹는 양이며, 평생 동안 하루에 6개씩 고화질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용량입니다. 기억 속에는 엄청난 양의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아직까지 인공지능의 추론 능력이 인간보다 떨어지는 이유는 학습된 정보의 양 차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기억 용량 1PB에 비해 작업기억 용량은 터무니없이 작습니다. 일반적으로 30초 이내에 다섯 개에서 아홉 개까지의 정보만 보관할 수 있다고 합니다.[^3] 물론 상징화된 대상이나 연결된 지식을 불러오는 단서 등을 작업기억에 표상하면 더 많은 기억을 불러오거나 작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뇌에는 작업기억이 있습니다. 작업기억은 책상 위에 필요한 책이나 자료를 잠시 올려놓고 사용하는 것과 같은 공간입니다. 단기간 필요한 정보를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행동을 선택하고 의사결정을 내릴 때 사용합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에도 비슷한 기능을 하는 곳이 있는데, 실행 중인 파일의 데이터를 빠른 속도의 임시 저장소에 올려놓고 사용하다가 작업이 완료되면 저장소에서 제거합니다. 이 공간이 바로 RAM입니다. 즉, 작업기억은 의식이 작용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RAM이 SSD(또는 하드디스크)에 비해 용량이 작은 것처럼, 작업기억 용량도 뇌의 기억 저장소 용량에 비하면 매우 작습니다. RAM과 SSD의 용량 차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업기억 용량은 뇌 전체 기억 용량인 1PB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습니다. 기억술 훈련을 하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30초 이내에 다섯 개에서 아홉 개까지의 정보만 보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기억의 용량은 작지만, 기억할 대상을 묶으면 더 많은 정보를 외우거나 의식할 수 있습니다.
작은 용량의 작업기억만으로 목표, 과거 진행 사항, 주변 상황, 특별한 이벤트, 필요한 아이디어와 정보, 갖가지 알림 등 이 모든 것을 고려하는 것은 벅찬 일입니다. 다른 기관이나 도구로는 대체할 수 없는 작업기억의 강점은 극대화하고, 나머지는 외부에 위임하면 인지 부하를 줄일 수 있습니다. 외부 도구나 장치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이죠.
아무리 좋은 도구나 뛰어난 인공지능이라 해도, 인간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자신의 필요나 상황에 비추어 평가하고 판단하는 일은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분석력은 뛰어나지만, 나의 상황이나 생각을 알 수는 없습니다. 내가 어떤 모습을 원하는지도 알 수 없죠.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생각하고 행동을 결정해줄 수는 없습니다. 자신만이 답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답이 아닌 선택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즉, Self Facilitation은 내가 좋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것입니다. 목표, 관련 정보와 아이디어, 놓치지 말아야 할 일정, 잘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불안 등을 외부에 위임함으로써 말이죠. 또한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것도 차단하면서요.
결론적으로, Self Facilitation은 나를 위한 시스템을 갖추는 일입니다. 주의력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외부에 위임하면서, 지금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게 할 수 있는 신뢰성있는 시스템을요. 이 시스템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은 바로 심리적 안정감입니다.
이번에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위해 고려해야 할 항목중에 작업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음에는 본문에서 살짝 언급한 '정지체계'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1] 책, 생각은 어떻게 행동이 되는가 072p
[2] The brain has 10 times more memory capacity than previously thought.
[3] 책, 기억의 뇌과학 05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