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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민 Aug 30. 2023

언니 아이

태초에 이유민이 있었다. 그리고 이영민을 만들었다.

(太初 아니고 胎初. 이영민이 태어나기 전.)


 언니가 늘 하는 말이다. 부모님이 들으면 서운하실 수도 있는 말을 부모님 앞에서도 망설임 없이 한다. 그만큼 자기주장을 확신한다.


 창조 객체로서 의견을 내보자면,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한 아이의 엄마가 된 현재까지도, 좋든 나쁘든 언니의 영향이 내 정체성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언니는 마치 언니가 되기 위해 태어난 아이 같았다. 3살 아이는 태열로 새빨개진 갓난 동생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온몸이 베이비파우더로 범벅된 동생에게 다가가 고사리 손을 꼭 잡고 눈을 맞추며 괜찮은지 살폈다. 외할머니께서는 동생을 바라보는 언니의 모습을 보고 참 인정이 많은 아이구나, 생각하셨다고 한다.


 우리의 어린 시절이 담긴 홈비디오 속 6살 아이는 겨우 2살 어릴 뿐인 동생을 업고 놀아준다. 4살씩이나 된 동생은 언니 등에 오른 채 태연하게 "응애응애"하며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언니 등에서 내려온 동생은 언니를 졸졸 쫓아다니며 언니가 알려주는 노랫말을 따라 한다.


 어린 날 기억 속 나는 늘 언니와 놀고 있다. 창의력이 풍부한 언니는 인형 몇 개만 갖고도 마블보다 방대한 영웅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침실 천장에 붙은 야광별 스티커만으로 스타워즈보다 생생한 우주활극을 연출해 냈다. 언니와 놀다 보면 밤이 너무 빨리 찾아왔다. 엄마가 잘 시간이라며 우리의 인형 영웅들을 압수하고 나서야 겨우 놀이가 끝났다. 하지만 우리의 밤은 계속됐다. 한 방에서 자던 우리는 잠든 척하다가 엄마가 방문을 닫으면 몰래 속닥이며 우주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다 엄마가 다시 방문을 열면 잠든 척했고, 둘 중 한 명이 정말로 잠들 때까지 자매의 야행은 계속됐다. (언니는 가끔 잠든 나를 깨워서 우주 항해를 강행하기도 했다)


 언니의 놀이가 무엇이든 나는 늘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중학생이 된 우리의 놀이는 만화였다. 언니를 따라 초 6 때 처음 일본 만화를 접한 나는 이른바 '오타쿠' 중학생으로 성장했다. 만화책방에 매일 출석은 물론 가방에 만화책을 10여 권씩 들고 다니며 반 친구들과 공유했다. 당시 사들인 만화책 수십 권은 여전히 나의 보물책장에 모셔져 있다.


 고등학생이 된 우리의 놀이는 영화와 음악이었다. 언니는 듣는 노래라곤 애니메이션 OST 뿐이던 중학생 동생이 답답했는지 어느 날 자기 MP3 속 음악을 들려줬다. 린킨파크와 뮤즈였다. 내 첫 반응은 미지근했다. 린킨파크는 좋은데 뮤즈는 좀 무섭다는 나를 언니는 미개하단 듯이 쳐다봤다. 언니는 굴하지 않고 록 전파 시도를 계속했다. 마룬 5, 오아시스, 레드핫칠리페퍼스, 트래비스 등. 언니가 하나 둘 사모은 앨범 CD를 같이 듣던 나는 어느새 언니보다 소장 앨범이 많아졌다. 나중에는 언니보다 록 콘서트나 페스티벌에 많이 다니는 '록덕후'로 자랐다.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언니는 고1이 되어서도 만화책만 보는 동생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자기가 이끌어놓고 모르쇠라니) 도저히 안 되겠는지 어느 날 언니는 내가 좋아할 거라며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여줬다. 이 영화에 홀딱 반한 나는 영화 자체에 흠뻑 빠졌다. 재밌는 영화를 찾아내면 CD에 담아 소장했다. 시험 기간이 끝나면 영화를 보게 해주는 선생님들이 계셨는데, 그때를 위해 영화 CD를 뭉탱이로 들고 다니며 학급 영화 담당을 자처하기도 했다. 장래희망이 투니버스 직원에서 영화 번역가로 잠시 바뀐 때도 이 무렵이다.


 영화에 이어 미국 드라마에 빠진 나는 대학교 2학년 1학기까지 밤을 새우며 미드를 보는 '미드폐인' 생활 중이었다. 가는 곳이라곤 집-학교가 전부였다. 점점 카우치 포테이토가 되어가는 룸메이트이자 동생이 안타까웠는지, 언니는 내게 클럽에 한 번만 같이 가보자고 거의 애원을 했다. 클럽은 언니가 이끄는 놀이 중 가장 내키지 않았다. 이른바 '날라리'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내가 클럽을 싫어할 이유는 많지 않았다. 나는 금세 클럽에 빠졌고 심할 때는 일주일에 4-5일씩 클럽에 가기도 했다. 남자 보기를 돌 같이하던 여대생이 클럽에서 만난 남자와 첫 연애를 하기도 했으니, 클럽은 내게 단순히 춤추고 음악 듣는 장소 이상의 영향을 준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나를 이끈 사람은 역시 언니였다.


 언니의 영향은 '놀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학원 한 번 다녀본 적 없는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가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도 언니였다. 언니는 효율적인 공부 방법을 만들고 가르치는 데 특출 난 선생이었다.(실천력은 별개다) 그리고 나는 언니가 세워준 공부 방법과 계획을 그대로 해내는 모범생 제자였다. 언니의 공부법은 곧바로 성과를 냈다. 고1 때까지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기도 빠듯했던 내 성적은 결국 원하는 대학을 포함해 정시 3승이 가능할 정도로 올라갔다. 자기가 세운 공부법이지만 차마 실천하지 못했던 언니는 내가 자기 교육법의 성공적인 첫 사례라며 뿌듯해했다.  




 동생이 언니를 잘 따르는 이유는 단순하다. 동경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니는 어린 동생이 보기에 동경할만한 이유가 많았다. 일단 나보다 키가 늘 10cm 넘게 컸고, 힘도 셌다. 거기에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피아노도 잘 치고 운동까지 잘하는 '만능 캐'였다. 어릴 적 내가 언니보다 잘하는 거라곤 동요 부르기 뿐이었는데 지금은 언니가 노래도 더 잘 부른다.  


 콩깍지는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만화나 보며 헤헤 실실 단순하게 살던 나는 세상에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언니가 멋져 보였다. 언니가 자기 생각이나 꿈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해 줄 때면 나는 종교 지도자에게 홀린 신자처럼 눈을 빛냈다.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언니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서 친구들까지 언니를 궁금해할 정도였다.


 성인이 된 지금은 콩깍지가 많이 벗겨졌다. 하지만 사이는 더 가까워졌다. 동경의 대상에게 품던 '기대'나 일방적인 '기댐' 대신 서로 의지하고 보듬는 우애가 자리 잡았다. 언니는 여전히 나를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만 때로는 누구보다 편한 친구로 대한다. 결코 남이 될 수 없는 가장 친한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세상 무엇보다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그래도 여전히 내가 더 언니에게 많이 기대고 의지한다. 나는 직장 고민, 결혼 생활, 가족 관계 등 온갖 문제를 언니에게 상담하고 해결책을 얻는다. 언니는 공감과 분석, 해결책 제시까지 풀코스를 제공하는 탁월한 상담가다. 문제를 들으면 '그런 걸 왜 고민하냐'는 핀잔과 함께 바로 해결책만 얘기하고 끝내려는, 상담가로서 자질 0점인 내가 늘 미안해하는 부분이다.


 그러다 내게도 기회가 왔다. 내가 언니보다 먼저 임신을 하게 되면서다. 3개월 먼저 임신한 나는 처음으로 언니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됐다. 언니는 여러 임신 증상, 출산 준비, 산후 후유증, 모유 수유, 육아 관련 조언을 내게 구했다. 30여 년 인생 처음으로 은혜를 갚을 기회를 얻은 나는 내심 들뜬 채로 언니에게 어설픈 조언을 하고 육아 용품을 나누기도 했다.




 두 달 전 언니 아이가 태어났다. 언니와 나는 공동 육아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언니는 이사 사정으로 조리원에 한 달이나 있어야 했다. 그동안 우리는 매일 아기들과 함께 영상 통화를 했다. 어서 두 아기들을 함께 키울 날 만을 기다렸다.


 한 달이 지나고 나는 언니의 새 집에 가서 언니 아이를 만났다. 하지만 언니는 집에 없었다. 조리원 퇴소 전날부터 탈진 증세를 보이던 언니는 퇴소 다음 날 결국 구급차에 실려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언니는 3주 동안 2번 수술을 받았다. 그동안 엄마와 나는 언니 아이와 내 아이를 함께 돌봤다. 언니와 내가 그리던 공동 육아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언니는 두 아이가 함께 있는 모습을 영상 통화로 보면서 "거기가 천국이네"라고 말했다.


 나는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두 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천국 같다가도 언니 생각이 날 때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힘들어하시는 엄마를 위로해야 했지만 철없는 막내딸은 자기감정 추스리기도 벅찼다. 엄마를 위로하고 싶은데 그 방법을 물어볼 언니가 없었다. 언니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매일 병원으로 출근하던 형부에게 나는 언니에게 쓴 편지 한 통을 부탁했다. 언니 인생의 마지막 험난함일 거라고, 형부는 참 좋은 남편이라고, 언니 아이는 참 순하고 똑똑하다고. 그리고 언니가 날 가장 필요로 하는 때에 내가 처음으로 정말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언니는 두 번째 수술을 받은 지 열흘 만에 퇴원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회복도 빠른 편이다. 의사 말에 따르면 '죽다 산' 언니의 병에 대해선 언니가 완전히 회복하면 다시 쓰고 싶다. 그래서 이 글은 미완으로 마치려 한다. 하루빨리 이 글을 마무리할 수 있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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