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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민 Jun 03. 2023

잠수 이별 당해본 적 있으세요?

이별 방법과 탈퇴 방법


"지금 너무 미안해서 통화는 못 할 것 같아."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던 밤 11시 20분 종로3가역. 남자친구는 내 전화를 거절하더니 짧은 문자를 보냈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정말 미안하다'라는 문자와 함께.      

 

 짐작하긴 했었다. 3년 8개월을 만난 남자친구가 2주 넘게 SNS 메시지에 답장을 안 하면 무슨 일이 있긴 한 걸 테니.      

 

 계속된 '읽씹'에 문제가 있음을 2주나 지나서야 깨달은 사정은 이렇다. 둘 다 사회초년생이 되면서 아침저녁 인사만 하는 정도로 연락이 뜸해졌지만, 상대를 신뢰했던 나는 연락 빈도의 변화가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나의 제대로 된 첫 연애였고 이 사람과 함께하는 미래를 당연하게 생각하던 순수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는 비겁했다. 오랜 시간 함께한 연인에게 직접 이별을 말할 용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마지막 문자에도 '헤어지자'는 표현은 없었다. 비겁함의 끝을 본 이별이었다.

 

 더러운 잠수의 맛을 보고도 데이트의 맛을 끊을 수 없었던 나는 2개월쯤 뒤부터 다시 가벼운 만남을 시작했다. 소개팅 앱에서 만나서 2개월 정도 데이트하다가 헤어지는 관계의 연속이었다.

      

 사랑 없이 시작한 만남의 수명은 짧다. 1~2개월이면 서로를 향한 호기심이 차게 식었음을 양쪽 모두 느낀다.

      

 그럴 때 남자들의 행동은 비슷하다. 문자로나마 헤어지자고 말해주면 예의 바른편이다. 대부분은 그냥 잠수를 탄다. 이별이라는 거사를 치르기엔 1~2개월 만난 사이는 너무 하찮다.      

 

 잠수 이별을 너무 많이 겪다 보니 나에겐 잠수 트라우마가 생겼다. 문자 답장이 3시간 넘게 오지 않으면 잠수를 대비하는 심리가 작동했다. 새로운 만남을 시작할 때도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방어기제를 세웠다.



 그렇게 상처 입은 마음이 치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소모임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당시 작성한 소모임 소개 글에는 나의 잠수 트라우마가 드러난다.      


'탈퇴하실 때

모임장에게 탈퇴 사유 말씀해 주시면

모임 개선에도 도움이 되고 

상처도 덜 받겠죠?

우리 모두가 소중한 인연이니 부탁드려요~~'

    

한 예리한 모임원은 이 소개 글을 보면서 내 잠수 트라우마를 짐작하기도 했다.      


 소개 글 덕분인지 모임을 나갈 때 이유를 말해주는 모임원들이 많다. 다양한 사정으로 모임 활동할 시간 여유가 없어졌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이들에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여유 생기면 언제든 돌아오라고 한다. 그렇게 여러 사람과 웃으며 이별했고 이들 중 몇 명은 웃으며 다시 돌아왔다.

      

 잠수 트라우마는 소개 글뿐 아니라 모임원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나는 처음 오는 모임원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현하지 않는다. 모임 닉네임이나 이름 이상의 정보는 웬만해선 물어보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원래 무심한 성격인 탓이다. 더불어 스터디 모임에서 나이나 직업 등 다른 정보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쿨'해 보이는 변명 너머를 들여다보면 언제 떠날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무의식에 깔려있다. 여러 인연을 겪으면서 내가 어떻게 행동하든 남을 사람은 남고 떠날 사람은 떠난다는 생각이 더 굳어진 탓도 있다. 상처만 남는 이별에 지쳐 만든 모임에서 또 다른 상처를 받고 싶지 않다는 몸부림이다.      

 

 반대로 모임을 떠나지 않는 사람을 내가 먼저 내치지 않는다. 2~3번 이상 본 사람이면 모임에 몇 개월씩 나오지 않아도 내쫓지 않는다. 모임에 고인 유령이 많은 이유다. 인연을 소중히 한다고 좋게 포장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나 역시 이별을 고할 용기가 없는 사람인 탓일 수도 있다.     


 여전히 잠수 트라우마의 흉터가 남아있지만 그나마 모임을 운영하면서 많이 치료됐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모임을 스쳐 가다 보니 만남과 이별에 무뎌진 덕(?)이다.      

 

 최근 몇 개월 동안 꽤 자주 활동하고 1박 2일 MT도 함께 갔던 모임원이 말없이 모임을 나갔다. 꽤 활발히 활동하던 사람이 나간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는데, 내 마음은 괜찮았다. '사정이 있겠지'란 생각이 들고 말았다. 잠수 트라우마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기분도 좋아졌다.

     

 며칠 전에는 차라리 잠수가 낫다는 생각이 들게 한 이별도 겪었다. 스터디 모임은 안 나오고 친목 카톡방에서 자주 떠들던 사람이 갑자기 "스터디방인데도 불구 정치얘기가 너무 많아서 결이 맞지 않음을 느껴서 나가보겠습니다 즐거웠습니다~!!^^"라더니 모임을 탈퇴해 버렸다. 탈퇴 사유를 말해달라고 한 건 나였지만, 그 사유가 타당하지 않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일단 이 사람이 나가기 전 방에서 나누던 이야기는 정치 이야기가 아니었고, 스터디 모임에 나오지도 않은 사람에게 '스터디방인데도 불구'란 지적은 듣기 싫었다) 


 정말로 나와 결이 맞지 않는 궤변 이별에 분노가 올라왔다. 한마디 해주고 싶어서 개인톡을 찾으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거기서 그쳤다. 다행히 화가 빠르게 가라앉으면서 어차피 결 안 맞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랑 기분 상할 일 더 만들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카톡 채팅방 닉네임을 '온점(.)'으로 바꿔 자기 정체를 숨기고 방을 나가는 잠수 이별도 잠시 유행했다. 이런 수요를 재빠르게 파악한 카카오톡은 최근 오픈카톡방 조용히 나가기 기능을 만들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나는 서운하기보단 귀엽단 생각이 든다. 닉네임을 바꾸는 노력까지 하면서 자기를 숨기고 싶어 하는 심리가 무엇인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떠난 사람의 마음이니 궁금하기보단 그저 귀엽다고 받아들인다.

      

 이별은 여전히 어렵고 겪기 싫은 일이다. 하지만 나는 점점 무뎌지고 있고 점점 잘 대응해가고 있다. 동시에 나의 옆에, 내 모임에 남아있는 인연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이들은 '우리 모두가 소중한 인연'이라는 내 믿음의 증인들이자 내 트라우마의 '힐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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