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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 짓는 타자기 Mar 01. 2024

사진에 관하여

이해한다는 것에 관하여

  나는 사진이 좋다. 인물 사진이든 풍경 사진이든 가리지 않고 두루 좋아한다. 사진이 왜 좋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한결같다. 상상할 수 있어서 좋아. 여백이 있잖아.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고는 다시 여백이 뭐냐고 되묻는데, 나는 이쯤에서 설명하기를 그만둔다. 그에 관해 설명하려면 적어도 A4 한 장 분량의 긴 서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농담 같지만 농담이 아니다. 나는 사진에 관해서라면 늘 할 말이 많다. 사진의 역사에 관해 말해야 하며, 브레송과 수잔 손택, 911 테러와 키스하는 연인, 인스타그램에 관해서도 말해야 한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어쩌면 나는 사진을 말하기 위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을 함께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좋아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인간은 대체로 긴 설명을 싫어한다. 그 탓에 사진을 주제로 얘기할 일은 거의 없다. 가끔 글로 내 생각을 정리할 뿐이다. 두서없이 써재끼다 보면 말하고 싶은 갈증이 해소되고 쓰기 전에는 하지 못했던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니까 가령 이런 것들이다. 왜 아직도 흑백 사진이 사랑받는 걸까? ‘총을 쏘다(shoot)’와 ‘촬영하다(shoot)’는 왜 같은 단어인 걸까? 같은 생각들. 물론 명쾌하게 답을 내리는 일은 드물다. 이런 류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기 마련이기에 적절한 선에서 끊어주지 않으면 끝이 없다. 수전 손택이 어째서 사진에 관해 그토록 많은 얘기를 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아무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는 사진이 좋다. 사진이 좋고, 사진이 말하는 방식이 좋다. 좋은 사진은 여백으로 말한다. 여백이란 시간과 공간이다. 영상과 다르게 사진은 시공간의 극히 일부분만을 보여준다. 우는 여자를 찍은 사진이 있다면 우리는 여자가 울고 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 왜 우는지와 울고 나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심지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여백을 상상으로 채워야 한다. 왜 그녀는 울고 있을까? 왜 그녀는 혼자 있는 걸까? 그렇게 상상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우리가 그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그런 거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주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고, 다행히 상상은 인간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문학의 대척점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문학이 허구로 진실을 빚는다면 사진은 진실로 허구를 빚는다. 진실의 한 단면을 던져놓고 그럴듯한 허구를 덧입히는 게 사진의 본질이다. 그렇기에 때로는 윤리적인 문제를 낳기도 한다. 수전 손택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구도를 잡는다는 것이며, 뭔가를 배제한다는 것"이라 말했다. 이에 따르면 사진은 진실이기는 하되 찍는 사람의 연출이 가미된 진실인 셈이다. 또한 수전 손택은 이렇게도 말했다.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욱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다시 말해서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00여 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자명하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고통이 서구 사회의 필요에 따라 전시되고, 소비된다는 말이다. 결국 사진가가 구도를 잡고 뭔가를 배제할 때 진정으로 배제되는 것은 피사체의 아픔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사진을 찍을 때 시선을 많이 신경 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올바른지를 신경 쓴다는 의미다. 자극적인 것을 좇고 있는 건 아닌지, 편견에 사로잡혀 피사체를 대하는 게 아닌지 고민한다. 이런 고민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 사진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다행히 지금은 개인이 영향력을 발휘하기 가장 쉬운 시대이기도 하니까. 내 하루는 이런 망상으로 기쁘다.


  아이들을 가르친 뒤로 나는 종종 낮은 자세로 사진을 찍는다. 낮은 자세로 찍으면 상대적으로 피사체는 높아 보인다. 그로 인해 다른 건 몰라도 아이들의 눈높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문득 팟캐스트에서 들었던 비유가 떠오른다. 이해란 ‘그 사람의 장소에 서 보는 것’, 다시 말해 그 사람의 ‘입장(立場)이 되어 보는 것’이다. 영어로는 ‘언더스탠드(understand)’. 마찬가지로 ‘그 아래에 서 본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는 궁금하다. 세상의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서야 할 자리는 어디인지. 모두가 자신의 자리만을 고집하는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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