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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이월 Jul 05. 2024

상실된 시대를 위한 진혼곡

무라카미 하루키 |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는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작가이다. 내가 처음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게 한 작품이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1Q84]였기 때문이다. 쉽고 잘 읽히면서도 도시인의 씁쓸함이 담긴 하루키의 문체가 마음에 들었고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루키 작품의 대중성을 부정하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일본 내에서만 놓고 보아도 1987년 발표된 [노르웨이의 숲]은 당시 400만부가 팔리며 열도에서 하루키 신드롬을 일으켰다. 한국에서도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번안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노르웨이의 숲 외에도 앞서 언급한 [1Q84]나 [해변의 카프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같은 다수의 장단편 소설들과 [먼 북소리],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등의 에세이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글은 하루키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노르웨이의 숲]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주인공인 대학생 와타나베는 죽은 친구인 기즈키의 연인이었던 나오코를 우연히 만난다. 두 사람은 잠시 가까워지는 듯하다가 어느 날 나오코가 사라져 버린다. 그 후 와타나베는 같이 강의를 듣던 여학생 미도리와 친해진다. 미도리는 조용한 나오코와 대비되는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로 와타나베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얼마 뒤 나오코가 정신 병원에서 요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와타나베는 그녀가 있는 정신 병원에 병문안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레이코라는 중년의 여성을 만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그럭저럭 잘 지내는 듯 보였던 나오코가 갑자기 자살해 버리고 와타나베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 도중 우연히 미도리와 전화를 하게 되는데 미도리는 “너 지금 어디 있어?”라며 그에게 묻지만 와타나베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 ‘나는 지금 어디 있는가’라고 혼자 되뇌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80년대 이후 대부분의 일본 작가들이 그렇듯 하루키 역시 사소설 작가로 분류된다. 사소설이란 개인과 내면에 대해 주로 다루는 소설 부류를 말하며 이는 일본 문학의 대체적인 특징으로 통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일본 현대 문학의 대표 작가로 불리는 무라카미 류와 요시모토 바나나 같은 작가들 또한 마찬가지다.


 하루키는 사소설이 주류인 일본 문학계에서도 사소설의 대가로 꼽히는 작가이다. 그러나 400만부가 넘게 팔린 [노르웨이의 숲]은 분명 일반적인 사소설과는 구별되는 다른 점을 가지고 있을 듯하다. 필자는 그 특징을 당시 일본 사회와 소설의 배경인 60년대 후반 일본의 사회 분위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60년대에서 70년대 초반까지,  일본은 지금의 인식과는 다르게 세계에서 가장 학생운동 및 진보운동이 활발하던 국가 중 하나였다. 특히 1968년 결성된 전국 학생 운동 연합 조직 전학공투회의 일명 전공투는 그 시기 일본을 다룬 문학 작품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이다. [노르웨이의 숲]에도 와타나베와 미도리가 강의를 듣던 중 전공투 학생들이 강의실에 들이닥쳐 연설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그렇게 활발하던 일본의 좌익 운동의 열기는 70년대에 들어서며 급격히 식는다. 거기에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대표되는 일부 극좌 세력의 테러와 인질극 사건이 이어지며 일본의 좌익 세력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1987년 발표된 [노르웨이의 숲]은 정확히 이 시기를 다루고 있다. 새로운 세상을 바라던 전공투 세대는 기성세대에 가까워가고 있었고 6, 70년대 일본의 학생 운동을 겪지 않은 세대들이 세상의 주역으로 나서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볼 때, 우리는 작품 속 나오코라는 한 개인의 죽음에서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다. 나오코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이야 말로 ‘이상의 상실’인 것이다. 여기서 이상이란 전공투 세대가 꿈꿨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상을 의미한다. 나오코라는 개인의 죽음이 그들이 꿈꾸던 이상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노르웨이의 숲]의 진짜 주제는 ‘젊은 날의 사랑과 상실’이 아닌 ‘꿈꿔왔던 이상과 그의 상실’이라 볼 수도 있다. 바로 이 부분이 많은 전공투 세대, 그리고 전공투 세대는 아니지만 일본의 학생 운동을 목격했거나 들은 이들의 마음을 자극한 것이다.


 이상과 현실. 그 속에서 이상을 쫓았지만 결국 몇몇 사건으로 인해서 이상을 놓쳐버린 이들. 그리고 상실되어 버린 시대. 이 소설을 젊은 날의 사랑이 아닌 이러한 이상과 상실에 주목하여 본다면 이전에 읽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읽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이 소설은 누군가에게는 떠나버린 사랑에 대한 장송곡, 누군가에게는 상실되어 버린 진혼곡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해석이 어떻든 이 소설의 핵심은 결국 하나다. 상실을 겪은 사람들에 대한 위로. 그것이 이 책의 진정한 진가이자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의 비결이라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자신은 이 책에서 어떤 것에 대한 상실을 위로받았는지 생각해 보길 바라며 글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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