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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Jan 10. 2022

타인의 고통이 위로가 될 때

책을 읽고 심하게 체했던 때를 기억한다. 처음으로 책이 내 삶과 연결되었다고 느꼈던 순간이었다. 중학교 2학년의 어느 여름날, 뒤에 앉은 친구가 재미있다며 소설책을 한 권 빌려줬다. 양귀자의 ‘모순’이었다. 당시 우리 동네에는 도서관도 없고 집에 소설책은 전무했던 터라 내가 봐왔던 책은 주로 어린이를 위한 전집류나 백과사전 따위였다. 교과서보다 약간 길쭉하고 두꺼운 판형부터 마치 어른들의 책 같았다. 점심시간에 밥을 먹은 뒤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는데 심장이 쿵쾅거렸다.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어 쉬는 시간이 되기만 기다렸다가 숨가쁘게 읽어 내려갔다. 어느새 내가 책 속으로 들어가 진진이라는 인물이 되어있는 듯 했다. 진진의 아버지가 내 아버지 같았고 진진의 어머니가 내 어머니 같았다.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상대적으로 부유한 친척에 비해 가난한 집, 생활력 강한 어머니까지, 모두 내 이야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가정폭력은 숨기고 싶은 비밀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한다는 사실은 수치스러웠고,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시려왔다. 불운한 가정은 나 혼자 겪어내고 있는 고통인 듯 보였다. 내가 아는 친구들의 부모님은 자상하고 사이가 좋아보였고, 엄해도 적어도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아 보였다. 친구집에 가면 걸려있는 가족사진 속 부모님은 활짝 웃고 계셨고, 레이스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의 얼굴에선 적어도 멍자국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나의 친척들도 모두 나와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들이었다. 풍족하게 지내는 큰어머니의 최대 고민은 그 해의 트렌드에 맞는 커튼 색깔이었고, 작은 어머니가 남편에게 찾을 수 있는 흠이라고는 고작 낚시를 자주 나간다는, 취미생활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보이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졌다. 어머니는 뒤엎어진 상을 치우고 나뒹구는 그릇에서 쏟아진 반찬을 쓸어 담았다. 나는 방문 뒤에 쪼그리고 앉아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어머니는 흐느껴 울면서도 다시 밥상을 차려내야 했고, 성실하지만 무능했던 아버지를 대신해 일하느라 손은 자주 부르텄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어머니에 대한 안쓰러움에 나는 자주 눈물을 쏟았다. 그런데 진진이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그래’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진진의 아버지도 술만 먹으면 밥상을 엎고 어머니를 때렸다. 접시를 던졌고 TV를 부쉈다.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술과 도박으로 돈을 탕진하고 수개월씩 가출하기도 했다. 진진의 어머니는 그런 남편과 사고를 치고 구치소에 간 아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시장에서 속옷을 내다팔며 억척스레 살 수 밖에 없었다. 그와 달리 진진의 어머니와 쌍둥이인 이모는 성공한 이모부 덕에 아이들을 유학 보내고 소설이나 시를 읽으며 여가를 보냈다. 윤택한 삶을 사는 이모의 존재는 어머니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때 처음으로 누군가의 이야기가 내 삶에 걸어 들어와 위로를 건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말고 다른 누군가도 이런 고통 속에 있구나. 특별히 불행한 줄 알았던 내 가정환경이 다른 누군가도 겪고 있는 아픔일 수도 있구나’를 어렴풋이 느끼게 된 것이다. 처음 느껴보는 안도감 비슷한 감정이었다. 진진이라면 우리의 원망과 두려움, 수치심에 대해 함께 밤새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타인의 고통이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더 깊이 알게 된 것은 시간이 조금 더 지나 고등학교 때였다.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교내에 기독교 동아리가 있었다. 음악 선생님의 비호 아래 한 주에 한 번씩 예배모임을 하는 동아리였다. 내 또래가 유독 많이 들어왔다. 남녀 성비도 적당한 우리 아홉은 종종 음악실에 모여 CCM을 듣거나 연주하고 방학에는 수련회나 봉사를 같이 다니곤 했다.


그러다 어떻게 그 이야기가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여느 때처럼 음악실에 모여 있던 우리는 하나 둘 자신의 가족사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아버지 사업의 실패로 찾아온 빚과 가난, 가출한 어머니, 딸이라서 받아야 하는 차별까지, 마치 누가 얼마나 불행한지 내기라도 하듯 털어놓았다. 늘 밝고 쾌활해보였던 친구들에게 그만큼 깊은 고통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나도 진심 어린 눈빛을 만나서인지 아무도 모르길 바랐던 내 이야기를 꺼내는 용기를 냈다. 누군가가 울었는지 아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숨죽여 이야기를 들었고 이야기가 멈추는 곳에선 같이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더듬더듬 서로의 마음을 헤아렸다.


여전히 나의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여전히 S의 어머니는 부재하고, 여전히 Y의 부모님은 아들만 감싸고돌았다. 우리의 고통은 멈추지 않았지만 때로는 부모님을 함께 원망하며, 때로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 시간을 견뎌나갔다. 채권자가 J의 집에 찾아온 날에는 야간자율학습 시간 어두운 복도 구석에서 같이 마음을 쓸어내렸다. S의 가출한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날은 스트레스를 풀자며 함께 팬시점으로 향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삶에 깊숙이 들어갔다.


우리가 더없이 친한 친구가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고통의 연대로 묶인 우리는 서로에게, 특히 서로의 고통에 누구보다 각별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과 부산으로 흩어져버렸지만 큰 일이 생길 때마다 가장 먼저 연락하는 상대는 서로가 되었다. 누군가의 남편이 큰 병에 걸렸을 때도, 누군가가 유산을 했을 때도, 전화를 붙잡고 함께 울었다. 우리는 누구보다 부모님의 일에 마치 세상에서 유일한 위로자가 된 것처럼 관심을 쏟았다. 나의 어머니가 편찮으실 때 한달음에 달려와 병상을 지켜준 이들도, K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가장 먼저 새벽 도로를 달려 창원까지 내려가 준 이들도 그 친구들이었다.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자기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이기도 했다.


진진은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인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상처는 상처로밖에 위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진진이 김장우라는 남자친구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아픔을 공감 받았듯, 우연처럼 비슷한 상처를 가진 우리가 만나 서로에게 단단한 버팀목과 위로가 되어주었다. 하도 이야기를 많이 해서인지 그토록 우리를 괴롭게 했던 부모님의 폭력과 학대에 대해서도 이제는 웃으며 말하곤 한다. 푸념 섞인 하소연에도 ‘야, 니네 아빠 아직도 그라나?’하며 혀를 끌끌 차기도 한다. 그것이 더 이상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우연처럼 우리 대부분은 타인의 고통을 돌보겠다고 상담가, 사회복지사, 목사, 간호사가 되었다. 고통을 잘 겪어낸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거라 믿는다. 진진과 친구들이 내게 그랬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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