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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 Jan 10. 2022

이기적인 글쓰기

온전히 스스로를 마주하고 용기있게 꺼내기

글쓰기 수업이 끝난 날에는 남편에게 털어놓기 바빴다. 마치 수년 전 상담을 받을 때, 상담실을 나오면서 누군가에게 새로 발견한 나에 대해 들려주고 싶어 안달나 했던, 그 때로 돌아간 듯 했다. “내 글은 이런 게 좋대, 이런 걸 고쳐야 한대”, ”작가님이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했냐면..“ 나는 아이처럼 흥분하며 남편에게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우리는 온라인으로 일곱 번 만나 글을 쓰고 서로의 글을 읽었다. 낯선 사람들에게 글을 써 보이고, 또 피드백을 듣는 과정은 누군가에겐 큰 용기가 필요하거나 매력적이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투명하고 친절한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한 우리는 부지런히 쓰고 작가님이나 모임 동료들이 주는 피드백을 한 톨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한국 시간 8시에 시작한 모임은 밤 12시, 1시를 넘기기도 했다. 누군가가 집요하게 읽어준다 생각하니 글을 쓰면서도, 그리고 합평하는 날을 기다리면서도 내내 설레었다.      


작가님은 우리에게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 좋은 에세이에 대해서, 에세이를 쓰는 방법에 대해서 들려주곤 했는데, 어떨 때는 마치 훌륭한 인생 강의나 설교를 들은 듯 마음이 몽실몽실해져 한 주 내내 기분이 동동 떠있기도 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가 글에 싣는 정서는 지하수와 같아서 깊이 내려가다 보면 모든 사람과 통한다는 이야기였다. 내 이야기를 깊이 써내려가서 도달할 수 있는 그 심연의 물줄기는 취향도, 배경도 다른 타인의 중심에 있는 정서와 맞닿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글을 공감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상담에서 ‘내담자는 항상 옳다‘라는 금언이 있다. 내담자가 맥락에 맞지 않게 불쑥 화를 내거나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무조건 상대를 비난할 때는 그 같은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이면의 외로움, 소외감 같은 정서, 그리고 ’관심 받고 싶다‘거나 ’마음 터놓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와 같은 욕구를 발견하는 순간, 그를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다. 상대를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안전, 성취, 소속감, 인정받고 싶은 마음 등 우리의 욕구라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글을 통해서도 누군가와 깊이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이유가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내 마음을 옮겨놓은 것 같은 글을 읽고 위로를 받았던 기억도 떠올랐다. 내 깊은 마음을 꺼내놓는 것은 늘 두려운 일이다. 나의 취약하고 구저분한 모습까지 무방비로 노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뱉으면 사라지는 말이 아닌 활자로 박제되어 버린다는 점도, 글을 읽는 상대가 누가 될지 알 수 없다는 점도 더욱 글을 쓰기 두렵게 만든다. 하지만 그 두려움 또한 모두가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넘어선 용기에 읽는 이는 안도하고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작가님의 말처럼 ‘단 한 명이라도 내 글로 위로받을 수 있다면, 후회나 비난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도전해볼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의 글은 그 사람을 잘 나타내주고 있었다. 그 사람의 욕구,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 방어기제가 모두 글에 들어가 있었다. 작가님은 술술 읽히는 글에서도 머뭇거리는 우리의 태도를 날카롭게 잡아냈다.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그 이면의 감정’ 에 대해 쓰라고 주문했고. 황급히 끝맺은 결론에도 좀 더 구체적으로 짚어보라고 조언했다. 우리가 어려운 감정을 만날 때 나오는 행동, 그것이 문제를 피해버리는 태도라든지 상황을 희화화하려는 시도, 진짜 감정이 아닌 겉에서 부유하는 기분에 시선을 두는 모습을 지적해냈다. 마치 오래 우리를 만나온 분석가처럼 말이다.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우리의 오래된 우울감, 수치심, 회의감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것을 위해 그 글을 쓴 터였다.      


첫 글 합평 때, 내가 작가님에게 받은 커멘트는 둘이었다. 하나는 내 감정이 너무 안 드러난다는 것, 그리고 과도하게 의미화를 시도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분석가에게 나를 들킨 것처럼 움찔했다. 평소 사람들과 관계 맺을 때의 내 태도이기도 해서이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나는 내 감정에 대해서 잘 드러내지 않는다. 주로 상대 이야기를 듣는 편이고, 누가 물어보기 전에는 내 신변에 대한 이야기도 잘 꺼내지 않는다. 특별히 숨기고 싶다기보다는, 사람들은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는 내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며 지루하게 만들고 싶지 않고,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내어 상대가 불편해지거나 후에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잘 모르겠다고, 친해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들 한다. 


그런 태도가 글에서도 드러났다. 다른 등장인물의 감정은 비교적 자세히 묘사된 것에 비해 내 감정에 대해서는 적혀있지 않았다. 이건 나도 좀 놀란 부분이었는데, 나를 표현해 보라고 깔아준 멍석 위에서도 내 감정에 그다지 비중을 두고 있지 않아서였다. 순간순간의 내 감각이나 감정에 워낙 무심한 성향 때문일까, 혹은 상대의 불편을 지나치게 배려하는 습성 때문일까. 글을 고치며 무감각하게 흘려보낸 내 감정에 더듬더듬 이름을 붙여주었다. 일단 궁금해하기 시작하자 고구마 캐듯 당시의 출렁였던 감정들이 우수수 떠올랐다. 써 보지 않았으면 끝내 모르고 넘어갔을 내 마음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글이 과도하게 의미화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그것 역시 나였다. 나는 무슨 일이든 그 속에 숨은 의미를 발견해내는데 재주가 있다.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게 된 일이나 상대의 사소한 친절, 직장 상사가 대수롭지 않게 던진 훈화 같은 말에도 의미를 부여해가며 혼자 감동하고 진지한 성찰에 빠져버리곤 한다. 의미가 없는 상황을 못견뎌하는 성격 탓이다. 특히 괴로운 일일수록 의미를 찾으려 애쓴다. 회사에서 부당한 일을 겪어도 사회생활을 배웠으니까, 관계에서 상대를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나를 성장시켰으니까, 몸이 고되고 힘들어도 마음이 단련되었으니까, 등의 의미를 덮어씌우곤 했다. 의미 뒤에 진짜 내 감정이나 괴로움은 재빨리 묻어두곤 했다.      


그래서 내 글은 사소한 에피소드 하나로 장대한 교훈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언뜻 ‘훌륭한 결론’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사실 연결고리는 빈약했다. 의미화로 가려진 솔직한 내 마음을 좀 더 꺼낼 필요가 있었다.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 욕망이나 감정, 여전히 남은 미련까지도 글 속에 포함시켜야 했다. 내가 원하는 의미로 결론지어지지 않더라도, 도덕적인 필터로 거르지 않고 삶을 그대로 마주한 글이 훨씬 더 진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남는 거 하나 없는 거 같은 고생스러운 시간도, 조금은 가볍고 피상적인 대화도, 별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짜증나는 마음도 모두 삶의 일부라 받아들이며 그 자체로도 의미 있다 생각하고 싶다.    

  

글쓰기 수업이 끝났는데 상담 세션이 끝난 듯 하다. 트렌드, 브랜딩, 재테크와 같은 시끄러운 이야기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하염없이 깊은 자기 이야기를 꺼내고 또 비춰주던, 고요한 우물가와 같던 시간이 끝났다. 일상을 단단하게 채워주던 무언가가 없어져버린 느낌이 들어 허전하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글을 계속 쓰고 싶다는 용기를 얻은 것, 나를 드러내지 않고 물러서 있으려 하는 내 한계를 벗어나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함께 글을 써나갈 스승과 동지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들 곁에 머무는 한 계속 글을 쓰고 싶어질 것 같다. 작가님의 말대로 ‘스스로를 왜곡하거나, 과장하거나, 은폐하거나, 자기를 방어하거나, 포장하려 하지 않고, 온전히 스스로를 마주하는‘ 좋은 글을 계속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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