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소설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존 버거는 그의 저서 ‘Ways of seeing’에서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라고 했고, 중동과 인도에 대한 서구의 시각을 말한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특히 유럽인의 입장에서 보는 한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저서에서 말한 선입견도 곧 다른 시각입니다.
또한, 우리는 죽는다는 표현을 “눈을 감는다.”라는 말로 대신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시각 기관인 눈은 인간의 감각 중에서 가장 발달한 기관으로, 뇌가 받아들이는 정보의 70%가 시각에 의한 것이라고 할 정도로 우리의 인지 과정에 가장 기본이 되는 기관입니다.
눈의 시각체계는 광학계통, 망막, 시각통로 3단계로 나뉘는데, 1단계인 광학계통의 주된 기능은 이미지가 망막 위에 떨어질 때 초점을 맞추어 주는 일입니다. 이렇게 형성된 이미지는 2단계인 망막에 전달되고, 망막은 시각정보의 변환이 종료됨과 동시에 처리가 시작되는 곳으로, 망막세포의 한 구성체이며 뇌로 전달되는 유일한 통로인 신경절 세포가 뇌로 입력되는 시각 정보의 유형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결정이 끝나면 시각정보는 후두엽으로 전달되고, 여기서 분해, 결합, 변형 등의 처리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시각정보는 인간의 인지과정의 주체인 뇌에 직접 연결이 되기 때문에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눈은 뇌의 연장된 구조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시각정보를 활용한 정치 사례도 적지 않은데, 대표적으로 조선미술전람회가 있습니다.
조선미술전람회는 3.1 운동 이후 펼쳐진 문화통치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사업이며 일제강점기 시기의 유일한 관설 공모전으로 심사기준이 엄격하고 정해져 있었고,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는 작품을 선별할 때 조선을 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그리기 위한 갖은 수단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한국화, 동양화를 떠올릴 때 연상되는 신비스러운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미술전람회 외에도 한국의 또 다른 시각정보를 활용한 정치 사례로는 1962년 4월에 열린 산업박람회가 있습니다. 5.16 혁명 1주년 기념으로 치러진 산업박람회는 경제개발계획을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쿠데타를 관람객에게 수용하게 만들었습니다. 산업박람회 전시관 구성은 이를 보여주는 시각적 장치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박람회장을 찾은 관람객은 혁명기념관을 먼저 마주해야 했고, 보는 자의 욕망이 만들어낸 시각적 장치이자 식민지적 앎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식민주의적 무의식의 반영이었습니다. ‘시선의 정치학’이라는 용어는 시선이 아닌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현재 시각정보가 넘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MZ세대들의 80% 이상이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기 전에 인스타그램에서 이미지를 검색한다고 합니다. 제로 텍스트 시대라고도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시각의 힘을 알아야 합니다. 타인이 보여주는 것이 아닌 자신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각정보는 의도가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이 남이 보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갑자기 보이는 것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것은 보이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새롭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눈앞에 빨간 웨이브가 흘렀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큼직한 검은점들이 떠다니더니 이내 모래를 뿌린 듯 자잘한 미세덩이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시야는 셧아웃.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외부로 피가 흐르거나 통증이 있거나 하질 않아서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하다 아차 싶었습니다.
유리체출혈에 망막혈관 이상. 그 외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라고 했습니다. 보통 당뇨나 고혈압 환자에게서 가끔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이라는데, 그 두 가지가 없던 나는 예외적인 현상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듯 춤추던 것들이 사실 출혈로 인한 피였던 것입니다.
일주일 뒤 수술을 잡았지만 일단 상황 살펴보고 호전되면 가급적 수술을 하지 않는 것으로 했습니다.
재수가 좋으면 피가 흡수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죠.
병원에서는 이유가 없는 출혈이라 당혹스럽다 했습니다.
그렇게 외눈박이로 살아보니 세상이 참 답답했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온전히 볼 수 없다니 억울도 했습니다.
외눈박이가 되니 원근감이 사라져 작은 턱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습니다.
이십일을 기다려봤지만 호전이 안 돼 결국 수술을 결정했습니다. 전신마취에 두 시간 정도 걸린 안과 수술 치고는 큰 수술이었습니다. 세수도 샴푸도 할 수 없었습니다. 꼬질하기는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그 덕분에 미용실 가서 샴푸 받는 호사도 누려봤습니다.
수술 후 열흘 이상을 불편하게 눈을 가리고 살았습니다.
자다가 무의식 중에 눈이라도 만질까 숙면은 포기했습니다.
드디어 눈을 가리고 있던 붕대를 떼어내는 순간은 얼마나 떨리고 무서웠는지요. 그리고 내 앞에 펼쳐진 온전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흐릿하지만 형체가 보였습니다. 완전해지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하고 더 좋아지겠지만 이만한 게 어디인가..
눈에서는 커피콩이 날아다녔습니다
핏덩이라는데 나만 보이는 커피콩은 엄청난 우주였습니다.
지금도 나만의 우주는 약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담당 의사 말로는 더 좋아지지는 않으니 더 나빠지지 않게 조심하라 했습니다.
온전히 보이는 세상을 마주한 나는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마치 보이는 마지막 여행인 것처럼 설렘을 가득 안고 말이죠. 지금도 아름다운 세상을 열심히 눈에 담아두는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새삼 건강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내 몸의 구성체에 대해 다시 한번 소중함을 느끼며 아끼고 살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