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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하유지향 Jun 01. 2024

탁란

숲이 요란하다. 푸른 나무들은 쏟아지는 햇살에 말갛게 씻은 손을 내어놓고 반짝반짝 말리느라 분주하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뻐꾸기는 제 새끼를 직접 부화하지 않고 다른 새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는다. 개개비, 멧새, 노랑때까치, 뱁새, 할미새, 휘파람새, 산솔새 같은 대리모 어미 새는 제 몸을 삼킬 듯이 다 자란 뻐꾸기 새끼를 먹이려고 날개가 해져 너덜거리면서도 숲을 힘들게 쏘다닌다. 제 새끼가 아닌 것도 모르고 금이야 옥이야 보살펴 키운다.           


오랜 떠돌이 생활로 한 곳에 뿌리내리는 것이 쉽지 않았고 마땅한 직장을 얻기도 어려웠다. 갈 곳도 오라는 곳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년도 없는 최고의 직장을 얻었다며 그는 들떠 있었다. 재취업이 결코 녹록지 않은 나이였다. 그는 숲에 날아든 뻐꾸기를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울울창창한 숲 속 이곳저곳에 어미 뻐꾸기처럼 알을 낳기 시작했다.

첫 탁란의 성공 여부에 따라 두둑한 연봉을 보장받을 수 있다며 크게 웃었다. 곧 멋진 둥지도 만들게 될 거라는 말에는 피식 웃음만 나왔다. 남편은 참나무 둥치를 군데군데 모아놓기 시작했다. 할 일을 찾지 못해 불안해하던 얼굴엔 생기가 돌았고 예전과 다르게 엷은 미소가 번졌다. 시큰둥하고 못마땅했지만 한 번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눈감고  넘어가주기로 했다.      


오랜 시간 사람 손길은커녕 발길도 닿지 않았던 숲은 거칠고 험하기만 했다. 야생의 숲은 침입자에 대한 날 선 경계태세를 한시도 늦추지 않았다. 산에 첫발을 들인 그를 숲은 경계대상 1호로 지목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가 하면 시시때때로 맹렬한 찌르기 공격으로 그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그럼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산에서 살다시피 하며 더운 계절을 지나고 추운 계절을 보냈다. 그제야 숲은 그에게 조금씩 곁을 내어주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비가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새벽길을 나서곤 했다.  쉬는 날도 없이묵묵하고 성실하게 산을 오르내렸다. 어느덧 해가 바뀌고 가을이 밤이며 도토리를 떨구고 있었다.

숲 속 여기저기 그가 탁란 한 알들이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참나무 둥치에는 갈색빛이 도는 표고가  다닥다닥 돋아나오기 시작했다. 나무 위로 올라온 동글동글한 버섯이 대리모 어미새 둥지 속 뻐꾸기 알 같았다. 그는 숲이라는 자연이 틀어놓은 커다란 둥지에 뻐꾸기처럼 탁란을 했다.


오라는 곳도 갈 곳도 없던 그는 아침밥숟가락을 놓자마자  자동차에 시동을 켜듯 흙 묻은 등산화 안으로 발을 밀어 넣고, 안전벨트를 당겨 매듯 등산화 끈을 단단히 묶는다. 오늘도 그를 넉넉하게 품어 안아 준 숲으로 내비게이션을 찍을 것이다.

뻐꾸기가 올 철이다. 탁란의 계절, 이제 그가 숲의 대리모가 되어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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