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나무가 줄지어 얼굴을 내밀면 곧 도착이다. 빨간 지붕이 허리짬에 수평을 맞출 때 차를 멈추어야 한다. 신작로에서 두 갈래로 난 언덕길을 미끄러지듯 몇 발짝 내려오면 밤을 떨구지 않는 둥치만 남은 할아버지 밤나무가 무너진 담장 역할을 하고 있다.
갈라진 길 사이는 엄마의 블라우스에 피어있던 꽃들이피며지던 야트막한 언덕이다. 불두화와 백합이 피었다가 지고 나면 금낭화가 피고 노랑 키다리 꽃과 참나리 꽃이 피었다 졌다. 봄부터 가을 내내 꽃들은 지천이었다. 갈라졌던 짤막한 길은 마당이 시작되는 곳에서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
햇살 혼자 분주한 오후다. 논과 마주하고 앉은 사랑채 마루가 시원찮은 무릎을 내밀고 물기 마른 고슬고슬한햇볕을 쬐고 있다. 뽀얀 먼지가 카펫처럼 깔린 마루는 고양이 발자국 하나 없이 민무늬다. 구석에 몽당빗자루가 보인다. 잠깐 엉덩이나 걸쳐 볼 요량으로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두툼한 먼지 카펫을 걷어낸 자리에 빗자루 무늬가 찍힌다. 앉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엉거주춤, 뒤로 뺐던 엉덩이를 채근하여 대문 쪽으로 향했다.
오래된 나무 대문은 입을 굳게 닫고 있다. 머뭇거리다 팔을 뻗어 문을 밀어 보았다. 삐그덕하는 낮은 소리와 함께 귀가 틀어진 대문이 틈을 벌렸다. 오랫동안 여닫지 않았는지 '삐이익'하며 잠긴 목소리 같은 기척을 냈다. 언제 다녀가겠노라는 기별을 미리 넣어두지 않았으므로 잠겨 있다한들 어쩔 수 없었으리라.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간다. 조심스레 대문 안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발이 먼저 한 발 성큼 내딛는다. 암전 된듯 대문간은 짧은 터널이다. 한낮인데도 서늘한 기운이 달라붙는다. 동굴 같은 습습함과 어둠이 훅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밝아진다.
안마당이다. 구름문양이 찍힌 파란 보자기를 네모나게펼쳐놓은 것 같은 하늘을 이고 묵상 중이다. 마당으로 두어 발걸음 들어선다. 이때다. 헛기침 소리와 함께 창호지를 바른 문이 마당을 향해 열리며 아버지가 나오셨지. 마당을 지나 댓돌 앞이다. 바람마저 한 점 없이 고요하다. 댓돌 위 쌓인 적막을 밟으며 나지막하게 ‘아버지’ 하고 불러 본다. 동그란 문고리가 햇빛에 반짝인다. 아버지는 대답이 없고 덩그러니 내 어릴 적만 홀로 마루 끝에 나와 앉아 있다.
창호지를 바른 격자무늬 문살에 다글다글 쏟아져 내리는 햇살도, 쇠죽 끓이던 가마솥을 얻고 앉아 있는 아궁이도, 언제 적인지 모를 소의 울음소리가 화석으로 굳어 있을 외양간도, 나무판자를 얼기설기 덧댄 대문간을 지나며 훅 올라오던 큼큼한 냄새까지도 모두 그대로인데 주인 잃은 집, 저 혼자 내 어릴 적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