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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하유지향 Oct 17. 2024

해외는 처음이라

지구별에 와서 반세기 만이었다.

띵동, 크리스마스는  아직 멀었고 굴뚝도 없는 집에 살지만 산타의 선물 같은 패키지 해외여행 꾸러미를 받았다.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마음이 방방 뛰었다.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은 이국의 풍경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sns에 내다 걸었고 나는 목줄에 묶인 강아지처럼 그들의 대문사진을 바라보기만 하던 차였다.


이번에는 지구 반대편 더 먼 곳으로 여행을 갈 거라는 친구의 말이 바람처럼 들려오기라도 하는 날이면 나라밖으로 한 발짝도 나간 적 없던 내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반백년 넘는 동안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온 것 같아 한숨이 쏟아져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들에 대한 동경과 부러움으로 마음속 풍선이 터지기 직전까지 빵빵하게 부풀어 오를 때면 지금껏 낯선 이국 풍경을 경험하지 못한 것을 남편 탓으로 돌렸다. 그날은 저녁밥상에 잔소리반찬 두세 가지가 기본으로 올랐다. 이 나이 먹도록 남들 다 가는 해외여행 한번 못 가본 분풀이를 남편 밥그릇에 쏟아놓았었다.


그런데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밖으로 탈출할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드디어 나에게도 난생처음으로 해외여행 골든티켓이 턱 하고 손에 쥐어졌다.

기회란 놈은 몸통이 짧고 굵다지. 더구나 앞 머리카락은 길지만 뒤통수에는 머리카락이 없다지. 우물쭈물하다 보면 아깝게 온 기회를 놓치게 된다지. 그래, 기회는 왔을 때 꽉 잡아야 한다고 했던가.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친해지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한 편이었지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과의 여행에 앞뒤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가겠노라 덜컥 대답먼저 질러놓았다.


해외여행의 꽃은 쇼핑이라지. 친구이지만 해외여행 선배인 그들이 풀어놓던 이야기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동안 해외여행을 다녀온 이들만의 암호 같던 화장품브랜드를 검색하고 평소에는 살 엄두도 내지 못했던 물건들의 목록을 메모장에 기록했다. 그곳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들로 여행가방을 가득 채워 나의 첫 해외여행을 만천하에 알리리라. 상상만으로도 이미 나는 둥실,  하늘을 날고 있었다.


캐리어를 사야 했다. 인터넷 쇼핑몰에 접속해 캐리어를 검색했다. 이 정도면 대형 캐리어를 구입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이 적당하고 저렴하면서도 튼튼한 빅사이즈 캐리어를 검색했다. 쇼핑목록에 담아둔 물건을 모두 담아야 하니 큰 사이즈의 캐리어가 필요할 것이 분명했다.


며칠이 지나 인터넷으로 주문한 캐리어가 도착한다는 배송문자가 날아왔다. 그날은 여행사에서 대략적인 여행일정을 알려주기로 한 날이었다. 4박 5일 일정의 중국여행이었다. 중국여행 코스로 익히 들었던 장가계나 계림 서안처럼 낯익은 지명이 아니었다. 곤명 여강이라는 낯선 지명의 여행일정을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  ‘왜 하필이면 중국?’하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중국은 다른 여행지에 비해 호텔이며 식당이 위생적이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차였다. 잘 정돈된 말끔한 도시 지역에서의 화려한(?) 쇼핑여행을 꿈꾸고 있던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첫 해외여행의 기회가 와서 좋다고 덥석 잡은 것을 왔다고 좋아서 앞뒤 돌아보지 않고 냉큼 신청한 것에 대한 후회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조금만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다 보면 만원 버스가 지나간 뒤에는 편안히 앉아서 목적지까지 타고 갈 수 있는 버스가 올지도 모르는데 안달복달하며 다음번 기회를 기다리지 못한 나의 조바심에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여행날짜는 하루하루 바싹바싹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을 다잡아도 자꾸 뒤통수 어딘가에 남은 미련이 근질거려 자꾸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출발하는 날 아침은 오고야 말았다.

사이즈는 거대하지만 속은 텅 비어서 제법 가볍게 굴러가는 빅사이즈 캐리어를 끌며 여유롭게 집결장소에 여유 있게 도착했다. 서로 안면이 있는지 먼저 와 있던 중년의 여자 서넛이 모여 속닥거리고 있었다. 얼핏 봐도 나보다는 연배가 꽤 있어 보였다. 배경음악을 틀어놓은 것처럼 이번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듯한 그녀들의 목소리가 이른 아침 찬공기와 섞여 리드미컬했다. 어쨌든 반세기를 살아온 나의 첫 해외여행지는 중국의 곤명/여강에 첫 발자국을 찍게 되리라. 이것 또한 나의 운명이려니 생각하며 급진적 운명론자적 사고로 재빠르게 전환했다.


환전을 넉넉하게 해 가라는 남편의 말 뒤로 많이 안 해도 되고 우리나라 돈도 쓸 수 있다며 친절한 오지랖이 끼어들었다. 덕분에 해외여행이 익숙한 듯 여유 있어 보이는 그녀와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누가 봐도 눈에 띌 빅사이즈캐리어를 최대한 구석진 자리에 주차하듯 박아 넣었다. 그녀는 작은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고 옆에는 콤팩트한 사이즈의 기내용 캐리어가 놓여있었다.


출발시간이 가까워지자 대기장소는 짐가방과 캐리어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대개는 기내용 캐리어에 배낭과 작은 크로스백 차림이었고 그보다 짐이 많아도 겨우 배낭하나를 더 맨 정도였다. 내 점보 캐리어는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며 눈에 확 들어왔다. 마치 지구밖 우주여행 짐꾸러미를 챙겼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즈음 나는 위장이 말썽을 부릴 때여서 음식 먹는 것이 조심스럽고 걱정되던 참이었다. 언제 무슨 일을 낼지 모르는 예민한 위장을 달래려면 평소에 먹던 대로 먹는 방법이 가장 안전했다. 집에서 먹던 대로 먹기 위한 최소한의 먹거리를 쟁여 넣다 보니 거대한 캐리어를 끌고 오게 되었노라며 멋쩍은 웃음과 함께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할 변명거리를 구상하느라 머릿속에 쥐가 날 것 같았다.


드디어 처음 보는 이들과의 4박 5일 여행이 시작되었다. 출국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혼자인 일행은 서먹하고 부부여행객은 환한 얼굴로 행복했으며 지인과 함께 한 일행은 미소 띤 다정한 표정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복잡한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눈썹을 크게 올렸다 내렸다 하며 연신 맞장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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