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동지, 전우애 느끼기까지..
남편과 신혼시절은 우리가 부부가 맞을까 싶게 개인플레이 성향이 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로 맞벌이라 자기 일에 바빴고, 나는 교대근무로 남편과 마주칠 시간이 적었던 탓에 서로 각자 할 일을 하며 살다가 아들을 출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교외로 장기출장을 가버려서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오기까지 주말부부 혹은 격주 부부가 되어 지냈더랬다.
당연히 아들은 남편과의 애착형성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고 생후 26개월 아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사 오기까지 남편은 아이에 대한 애정이 거의 없는 듯 보였다. 아들 셋 중에 막내로 태어나 그. 나. 마. 친절한 구석이 약간 있긴 했지만 시부모님들께만 해당되는 이야기였고, 매일 티비에 빠져 폴짝폴짝 뛰어대며 애교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아들에게 애정을 느낄 리 만무했다.
그러다 숙제처럼 둘째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천만다행으로 애교 가득한 딸을 낳았더니 남편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바라만 보아도 사랑스러운 딸을 키우며 아들에게 점점 마을을 열기 시작했고, 결혼한 지 근 5년 만에 나름 가정적인 남편으로 변해갔다.
물론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부딪히는 부분도 참 많았다. 간이 좋지 않은 남편이 술을 마시고 오는 날이면 투닥투닥 싸우기 바빴고 미래를 위한 과도한 투자로 인해 월급에서 투자금을 빼고 생활비를 쥐어주다 보니 나는 생활비와 아들 치료비용에 항상 쪼들리는 생활을 해야 해서 속상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아들의 자폐스펙트럼은 조기에 치료가 들어갈수록 성인이 되었을 때 예후가 좋다는 이야기를 워낙 자주 들어서 6살부터 감각통합치료, 언어치료, 심리치료 등 할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었지만 생활비가 항상 내 발목을 잡았다. 회당 4~5만 원씩이나 하는 치료 수업을 한 개도 아니고 일주일에 3~4개씩 잡았더니 당연히 생활비는 부족했고 생활비를 더 달라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내 옷 한 벌 사 입지 않으면서도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들이 언제쯤이면 말이 트여서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을까?' 매일 걱정에 묻혀 살았고, 내 마음을 몰라주는 남편이 참 야속하게 느껴졌었다.
함께 살면서 항상 대화가 부족했고 아들의 장애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던 남편이었다.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그가 코로나가 터지면서 회사 회식자리가 줄어들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고, 내 이야기에 귀기울여주며 아이들을 키우느라 참 힘들겠다며 마음을 헤아려주는 모습도 보이게 되었다. 아이들을 위해 여행 스케줄을 자주 잡아 4 가족이 함께하니 여행을 갔을 때만큼은 아이들에게 집중해주는 훌륭한 아빠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뒤돌아보면 남편은 회사에서 스트레스가 많았을 텐데 집에서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었고,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주말도 없이 근무해야 하는 남편이 이제는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과한 투자라고 생각했던 부분도 다 가족을 위한 선택이었고 덕분에 지금은 돈에 쪼들리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혼한 지 8년 차가 되어서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육아 동지가 되었고 남의 편이라 느꼈던 사람이 이제는 오롯이 내 편이었음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풋풋한 연애감정은 느낄 수 없지만 우리 가족을 위해 한배를 탄 동지이기에 으쌰 으쌰 헤쳐 나갈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까먹지 말기를..
오늘 남편이 쉬는 날이라 내게 자유부인 시간을 줘서 이 글을 적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 바이다.
항상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