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아가는 과정
여유의 사전적인 이유는 1. 물질적, 공간적, 시간적으로 넉넉하여 남음이 있는 상태, 2. 느긋하고 차분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마음의 상태. 또는 대범하고 너그럽게 일을 처리하는 마음의 상태를 일컫는다. 영화를 보거나 소설책을 읽으면 등장인물의 여유로운 모습들에 항상 매료되곤 했다. 느긋하게 시간을 즐기고 사색하며 그 자체로 행복해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이상적으로 보였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여유가 넘치는 삶을 살아내고야 말겠다는 다짐도 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의 10대와 20대는 치열했다. 나의 10대는 대학교 진학을 위해 학교와 학원을 다니느라 하루를 허비했고, 나의 20대는 취업을 위해 학원과 스터디를 전전했다. 취업을 하고 나서는 회사에 열정을 쏟아내느라 시간이 조금이라도 나면 몸과 마음을 쉬어내는데 급급했다. 그런 하루하루를 살면서도 나는 나름대로의 여유를 가지고 살고 있다고 자부했다. 저녁이면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면서 작은 캔의 맥주를 마시는 여유, 주말에 친구들과 맛집을 돌아다니며 즐기는 여유, 스터디를 가기 전에 카페에 들러 커피를 한 잔 시키는 여유를 즐기는 내가 너무나도 뿌듯했다.
영국에서 살게 되면서 하루 24시간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된 것을 처음으로 겪었다.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고 취업을 위해 학원이나 스터디를 가지 않아도 되었다. 처음 6개월은 너무나도 행복했다. 그렇게나 바쁘게 살았던 나였기에 이런 꿀 같은 휴식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록 이런 삶을 계속 이어나가다 보니 마음이 너무 불편하고 거북했다. 갑자기 주어진 시간 앞에 무엇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말 그대로 '여유'가 주어졌는데 그걸 즐기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나는 정말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유를 즐겼던 것일까?'
'여유란 무엇일까?'
차고 넘치는 시간 앞에서 그저 막막했다. 뭔가를 해야만 할 것 같았고 새로운 것에 도전을 하지 않으면 도태되지 않을까 불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시간에도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학원을 가던, 스터디를 하던 무언가를 하며 자신을 갈고닦을 텐데 나는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고 동네를 산책하다 보니 영국 사람들의 생활에 눈에 보였다. 평화로운 미소를 지으며 정원을 가꾸는 사람, 화창한 햇살을 만끽하며 공원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햇살을 느끼는 사람, 강아지와 함께 조깅을 하는 사람, 카페 벤치에 앉아 커피를 한 잔 시켜두고 독서를 즐기는 사람 등등. 다들 나처럼 불안해하기는커녕 평온하고 행복한 얼굴로 지금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내가 영화에서만 보던, 소설로만 읽던 그런 모습들이 눈앞에 현실로 바라볼 수 있게 되자 '아, 결국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여유를 즐기지 못했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게나 바쁘게 살았으면서 주도적으로 시간을 관리하면서 살았던 적이 없었다. 항상 무언가에 바쁘게 쫓기듯 살았고 그 사이의 짬이 나는 자투리 시간을 '여유'라고 믿었던 것이다. 나는 물질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넉넉함이 없었음에도 그걸 '여유'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차고 넘쳐나는 시간을 맞닥뜨렸을 때, 그 시간을 진정으로 '즐기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친했던 영국인 친구에게 물어봤다.
"너는 여유가 있을 때 뭘 하니?"
"내 취미에 시간을 쏟지."
"너의 취미는 뭔데?"
"나는 가드닝을 좋아하고, 베이킹도 좋아해. 요가를 하기도 하고 수영을 가기도 해. 하이킹도 좋아해서 하이킹도 가. 자전거 타는 걸 좋아해서 날이 좋을 때는 자전거를 타고 옆 동네까지 다녀오기도 해. 너는 취미가 뭐야?"
친구의 질문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나는 취미가 뭘까?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학창 시절 취미를 적는 란이 있으면 음악감상 혹은 독서를 대충 적어내고 말았는데 그건 '진짜' 내 취미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나는 남들이 다 하는 것만 해왔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만 해왔지 '내가 좋아서' 무언가를 시작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스스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여유를 즐길 줄 모른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사실 아직도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지 못한다. 더해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고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넘쳐나는 시간을 보고 막막해하지는 않게 됐다. 영국에서의 가르침이 스스로와의 대화를 조금씩 이어나갈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로 나중에 60대, 70대가 되었을 때의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어른이 되어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