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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Hong Mar 29. 2024

부유하는 상처 3

귀신을 부른다.

학교에 다녀오니 미스 신은 이삿짐을 풀고 있었다.

모르는 척 문간방을 지나쳐 가는데, 대뜸 그녀는 나를 꼬마라고 불렀다.

"꼬마, 학교 다녀오니?"

"나 이름 있어요!"

"누가 이름 없대, 그냥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 거지."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거 같아 소리를 질렀다. "엄마! 배고파 밥 줘!"


어느 일요일이었다. 마루에 누워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마루에서 마주 보이던 그녀는 좀 전까지 마당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빨래가 끝났는지 좀 전까지 시끄럽던 물소리가 멎었다. 누워서 쳐들고 있던 만화책에서 눈을 떼고 문간방 쪽을 쳐다봤다. 그녀는 쪽마루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잽싸게 눈을 만화책으로 옮겼다.

"꼬마야! 꼬마야!"

"아, 왜요?" 귀찮은 척하며 고개를 돌려봤다.

"이리 와 봐." 둘 밖에 없는데 목소리를 낮추며 손짓을 했다.

"왜요?"

만화책을 내려놓고 서서히 일어나 마루밑 널려진 슬리퍼를 발가락으로 당겼다. 짝도 안 맞는 슬리퍼를 끌며 좁은 마당을 거쳐 그녀가 있는 쪽마루 앞으로 갔다.

"꼬마야, 너 커피 마셔봤어?"

"커피요? 커피우유는 먹어봤어요."

"마셔볼래?"

"진짜요?"

"매니큐어 거의 다 말랐다." 그녀는 손가락을 입으로 후후 불며 하얀 손에 새빨간 손톱으로 뒤편의 장난감만 한 노란색 주전자를 집었다. 그러고는 쪽마루에서 폴짝 뛰어내려 마당의 수도에서 물을 받아 곤로에 올렸다. 불을 켜놓고는 찬장에서 커피잔 두 개를 꺼냈다. 손잡이에 멋을 낸 작은 잔은 노란색, 빨간색 꽃으로 선을 만들고 있었다. 번갈아 보던 노란색 주전자, 빨간 손톱에 눈이 시렸다. 쪽마루 앞의 나는 그녀 방을 곁눈질로 살폈다. 비키니 옷장 옆의 앉은뱅이 화장대에는 아모레, 피어리스 병들이 사이좋게 정렬돼 있었다. 작은 병이나 네모 상자에는 뜻 모를 한자들이 적혀있었다. 커피잔을 꺼낸 찬장은 고춧가루, 간장, 된장, 고추장이 안 보였다. 찬장에는 커피와 커피잔, 접시밖에 없었다. 그녀는 커피병을 꺼내 작기만 한 스푼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분말커피를 잔에 옮겼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내 눈은 알록달록한 접시에서, 앙증맞은 사기그릇들에서 서성였다. 그녀는 끓는 물을 붓고 그 작은 스푼으로 빠르게 내 잔에 설탕 세 스푼을 넣고 자신의 잔에는 한 스푼을 넣었다. 그리고 프리마 두 스푼을 넣었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마셔. 쓰면 말해, 프리마 더 넣어줄게"


그날 밤 아무리 숫자를 세도 잠을 잘 수 없었다. 별들을 세어보고, 본 적 없는 양의 숫자도 세어 보았다.

잡지 못 할 잠은 멀리서 비웃고 가슴은 소풍 가기 전날처럼 하늘로 치솟기만 했다.

너무도 조용한 밤은 잠에 방해만 됐다. 떠다니는 가슴에 어쩔 줄 몰랐다.

그때 미스 신의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조심스러운 대문의 빗장 들리는 소리, 익숙했던 나무 스치는 소리가 귀를 할퀴었다. 연이어 구두 소리가 들렸다. 무게에 짓눌리는 쪽마루의 비명이 들리고 소리는 사라졌다. 더워서 차 버렸던 홑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마루의 자명종 시계가 12번을 울렸다. 통행금지 시간이 됐고 곧 귀신이 나올 시간이었다. 몇 발짝 안 되는 마당의 넓이를 원망했다. 미스 신이 귀신을 불러들인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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