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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Hong Mar 29. 2024

부유하는 상처 4

하얀 더 하얀

평소보다 이른 6시부터 서둘렀다. 잠이 덜 깬 손자를 재촉했다. 토스트 빵에 버터만 묻혀 손자에게 내밀었다.

다른 날보다 10여분을 일찍 손자를 내려줬다. 너무 이르다는 손자의 투덜거림을 뒤로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사람들이 만든 긴 줄의 정류장은 비어 보이기만 했다. 5분, 10분이 지났을까, 체념한 채로 서서히 차를 빼는데 저 앞 좁은 교차로에서 그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내 차를 지나쳐 가는 그녀. 미스 신이었다. 순간에 본 지난번 얼굴을 착각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예전의 그녀를 빼닮은 그녀였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해 기어코 차를 다시 길가에 세웠다. 두근거리는 가슴이 그때의 나에게 손짓한다.


엄마는 동생을 데리고 계모임에 갔고 나는 쓸데없이 안방과 건넌방을 오가고 있었다.

무척 더웠고 규칙적으로 터덜거리던 선풍기가 열기를 더했다.

"꼬마야! 커피 마실래?" 그녀의 목소리가 내심 반가웠지만 내색을 못했다.

"꼬마라 부르지 마요!"

"그럼 야마꼬 어때?"

"그게 뭐예요?"

"뭐긴 뭐야! 꼬마야 거꾸로 한 거지.." 그녀는 뒤로 넘어갈 듯 크게 웃었다.

나는 약이 올라 소리를 냅다 질렀다. "싫어요! 더운데 무슨 뜨거운 커피를 마셔요!"

"그래 덥긴 덥다.. 이번 여름 지독하네.." 서서히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가 번졌다.

빨간 입술의 꼬리가 귓불을 향했다.

"꼬마야 우리 등목하자! 이리 와!" 그녀는 이미 티셔츠를 긴 목 위로 올리고 있었다.

"누구 올지 모르니 넌 문부터 잠가!"

나는 대꾸도 없이 그녀의 명령에 따르고 있었다. 문의 빗장을 잠그고 수돗가로 갔다.

그녀는 이미 가슴을 내보이며 엎드려 있었다.

"팔 아파.. 빨리 물 좀 뿌려봐!" 수도에 걸려있던 초록색 호스를 끌어당겨 조심히 물을 흘렸다.

"야! 간지러워.. 바가지로 그냥 부어!"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기에 바빴다. 엎드려 있으면서도 한 손으로는 자신의 가슴 쪽으로 물을 보내려는 하얀 손 그리고 더 하얀 젖가슴에 현기증이 났다.

"꼬마야 뭐 해? 끝났으면 저기 수건으로 물기 닦아야지.."

나는 쪽마루 위 빨래 줄의 수건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내 눈은 그 옆 엷은 살색 브래지어에 멈춰있었다.

그 색이 베이지 색이었다는 건 한참 후에 알았다.

"야마꼬! 빨리 닦아 팔 떨어지겠다!"

그때서야 그녀를 돌아보고 등의 물기를 꾹꾹 눌러가며 닦았다. 점 하나 없는 등이었다.

"자 이제 니 차례.. 뭐 해? 엎드려!"

"저 등목 안 할 건데요!" 나는 집 마루로 도망치듯 뛰어올랐다. 늦여름, 마루는 끈적이기만 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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