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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Hong Apr 01. 2024

부유하는 상처 6

뉴욕행

미스 신을 닮은 여자들과 몇 번을 마주쳤다.

교회의 성가대 선생님이 미스 신을 닮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세운상가 근처의 조명가게에서 미스 신을 봤다. 미스 신의 행방은 몰랐고 미스 신을 닮은 그녀들과 사랑에 빠졌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녀들의 브래지어와 하얀 젖가슴을 상상했다. 내가 정상이라고 믿을 수 없던 시절이었다. 주위의 눈초리를 의식하며 또 다른 미스 신을 찾아 헤맸다. 미스 신들과 가까워질수록 멀리하고, 그 멀어진 거리를 원망했다.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그들은 내 잘못이라 했다. 나이 서른이 되었지만 연애는 남의 일이었다. 중매를 서겠다는 사람들이 나섰다. 맞선 자리에서 만난 이들 모두가 중매쟁이 탓, 내 탓을 했다. 그들은 내가 아프다고 했다.

어머니, 아버지도 내가 아프다고 했다. 정신이 아파서 그렇다고 했다. 나는 아파야 하는 사람이었다.

서른두 살 생일이 지나고 며칠 후였다. 이민을 가 뉴욕에 살고 있는 이모에게서 편지가 왔다. 이모가 개업한 야채가게에 일손이 필요한데 이 참에 뉴욕으로 와보는 게 어떠냐는 내용이었다. 어머니, 아버지와 상의를 했다. 두 분 모두 좋은 생각이라며 다녀오라고 했다. 뉴욕행은 이모와 어머니가 나 몰래 미리 계획했던 일이었다. 초정에 필요한 여러 서류가 오가고서야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뉴욕 구경을 하며 마음 정리를 하려던 계획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보며 허물어졌다. 한국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모의 주선으로 맞선을 보고 두 달 후, 식을 올렸다. 나보다 더 기뻐한 건 어머니, 아버지, 이모였다. 다행히 야채가게 일에 재미를 붙였다. 새벽부터의 생활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어떤 생각이 건 사치로 느껴질 때였다. 우리 부부는 5년의 주급 생활 끝에 아스토리아에 가게를 갖게 됐다. 작은 가게였지만 딸 둘을 키우며 주 7일 가게문을 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돈 세는 재미로 피곤을 잊었다. 집은 가게 위층으로 이사를 했다. 위아래층을 오가는 삶이 지루하지 않았다. 과일이 건 야채 건 진열만 해놓으면 팔려 나갔다. 늦은 밤 돈 세는 것도 귀찮아 돈이 든 누런 봉지를 매번 침대 밑으로 쑤셔 넣었다. 어느 날 돈을 세려고 침대 밑을 보니 돈이 가득한 누런 봉지가 먼지를 묻힌 채로 쉴 새 없이 나왔다. 돈 봉지는 언제 넣었는지도 모르는 옷장, 화장대, 책상 서랍 같은 곳에서도 발견됐다. 간혹 가슴에 새겨진 상처 같은 병이 꿈틀거릴 때가 있었지만 곧 상처는 내 몸 어딘가의 심해로 가라앉았다. 부력의 힘이 미치지 못할 곳이었다.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을 했던 사람과는 19년을 같이 살았다. 비가 오던 저녁, 소파에 누워 자다가 깨어나지 못했다. 나에게 늘 냉정하다고 불평하던 사람이 냉정히 급작스레 떠났다. 너무도 황망한 죽음이었고 나는 죽음을 우두커니 받아들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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