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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Hong Apr 20. 2024

그녀의 그림자 2

그녀를 만난 건 중국 남자와 결혼하는 한국 여자의 결혼식이었다. 

중국계 미국인인 신랑은 건장한 체격에 누가 말을 걸어도

호탕한 웃음부터 짓는 유쾌한 남자였다.

그에 비해 영어에 한국어 악센트가 심하고 또박또박 영어를 구사하는 신부는 무척 조용했다.

백육십 센티미터가 조금 넘을 키에, 선이 뚜렷한 콧날을

가진 미인이었다.

눈가의 주름 폭은 넓었다. 어떤 연유의 이민인지는 몰라도 부모 말고는 별다른 친척도 없었다.

먼 친척이라며 앞니 빠진 사내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 전부였다.

신부가 드레스를 안 입고 있었다면, 신부가 짙은 화장을 안 하고 있었다면 장례식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신부 측 분위기였다. 신부의 어머니는 옆에서 태풍이 불어도 무심할 것 같은 얼굴로 내내 신부만 바라보고 있었다.

유난히 닮은 모녀의 눈매가 기억에 남는다. 워낙 분위기가 가라앉아, 사진사가 분위기 메이커까지 하며 촬영을 해야 하는 피곤한 결혼식이었다.


그녀는 세 명의 들러리 중, 한 명으로 신부의 옆에서 유난히 신부를 챙기고 있었다.

자주 삐뚤어지는 귀걸이를 고쳐주고, 사진 찍을 때마다 펼쳐줘야 할 드레스를 허리 굽혀 펴 주었다.

곱상한 얼굴과 상반되는 이국적 피부 빛, 쌍꺼풀 없이 큰 눈, 가늘고 마디가 모나지 않은 손가락,

궂은일 마다하지 않을 훈련된 어깨선. 잔뜩 굳어있는 신부의 아버지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가

살갑게 대하는 성격이었다. 이마의 주름을 한껏 모아 인상을 쓰고 있던 신부의 아버지도 그녀에게는 웃음을 보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시선을 끌었다.


어느덧 밤은 깊었고 연회를 마칠 시간이 다가왔다.

신랑, 신부는 중국 전통의상으로 갈아입고 나와 한껏 신혼의 아름다움을 뽐냈다.

신랑, 신부는 들러리들과 하객들의 테이블을 일일이 돌며

인사를 건네고 건배를 외쳤다.

중국 결혼의 전통이긴 하지만 과도한 알코올 섭취에 신랑이 걱정됐다. 신부가 입은 치파오는 한 여름 장미 같은 탐스러운 붉은색이었다.

화려하지 않은 듯 멋을 낸 치파오는 가슴 언저리의 매듭으로 중국식 포인트를 줬고 무릎 위까지 터져있는 옆선은 마냥 에로틱했다.

하객들은 탄성을 지었고 짓궂은 신랑의 친구들은 휘파람을 불어댔다. 하지만 나는 누가 봐도 빌려 온 들러리,

치파오를 입고 있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초록색에 가까운 연두색에 이름 모를 꽃이 새겨진 치파오.

뚜렷하게 몸매를 보여주는 얇은 겉감. 긴 목에서 이어지는 어깨선, 적당한 근육의 긴팔.

치파오의 틈새로 보였다 말았다 하는 살갗.

나는 그날 그녀의 사진을 신부보다 많이 찍었다.

이 연회가 끝나면 다시 못 볼 얼굴이었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데 술에 취한 신랑이 나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놀라서 쳐다보니 벌건 얼굴의 신랑이 마오타이병을 흔들어 보인다. 이미 그의 손에는 술잔도 들려 있었다.

평소라면 정중히 거절했을 잔을 받아 깔끔히 들이켰다.

어딘가에서 그녀가 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중국 술 특유의 향, 나에게는 양파 볶음 같이 느껴지는 냄새가 목젖을 달궜다.

신랑과 신랑 들러리들이 하오! 하오! 를 외친다.

기분이 들뜬 나는 두 잔을 더 받아 마셨다.

더 커지는 하오! 하오! 외침..

나는 없던 용기가 생겨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큰 눈이 더 커지며 내 눈과 교차했다.


"혹시 남자친구 같은 거 키우시나요?"

용기에 비해 보잘것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길게 느껴진 찰나의 침묵 후,

웃어도 작아지지 않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녀가 조용히 입을 뗐다.


"아직 입양 전이에요."


"저.. 저는 32년째 입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웃었다. 밝고 크게 웃었다.

급히 바텐더에게 펜을 빌리고 그녀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그녀는 내 손바닥 위에 전화번호를 적었다.

그녀의 이름은 연수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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