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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Hong Aug 27. 2024

일본 여사친

아내도 아는..

유학 기간 동안 외국 친구들과 집 하나를 빌려 한 지붕 생활을 했다.

학교와의 거리가 멀어지긴 했지만 기숙사보다 저렴한 가격이었다.

방 3개에 한국, 대만, 일본 국적의 젊은이 3명.

문화도 다르고 식성도 다른 사내들이 술만 마시면 다 똑같아지는 날들이었다.

주말이 되면 서로 불러온 친구들로 집은 북적거렸고, 빈손으로 오지 않은 친구의 친구들 덕분에 일용할 주류를 챙길 수 있었다.

처음으로 우리 집에 발을 디딘 친구들은 짐승우리 같은 집안 분위기에 놀라면서도 바로 익숙해졌다.

아마도 공기 중의 술 농도 때문이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때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오가다 보니 누가 진짜 거주자인지 모르는 친구들도 있었다.

여자? 당연히 많은 여자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그리고 예상대로 문제가 생겼다.


대만 친구의 양다리 연애가 문제였다.

한 명은 한국 여자, 다른 한 명은 일본 여자.

한국 여자는 어느 친구의 친구였고 일본 여자는 나와 같은 학교 같은 전공의, 내가 데려 온 여사친이었다.

두 여자 사이에서 위태로운 연애를 하는 대만 친구.

얼떨결에 곡예에 동참하게 된 나.

삼각관계는 남의 사생활이니 무시하려 했지만 어떻게든

나와 연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집안에 전화기는 단 한대.

전화에 자동응답기가 설치되어 있을 때였다.

전화벨이 울리면 받아야 했고 대만 친구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누구와 있는지 거짓말을 해야 했다.

대만 친구의 연애가 무르익으며 거짓말의 횟수는 늘어만 갔다. 시간이 흐르며 희한하게도 당사자들만 모르는 소문이 퍼져갔다. 소문을 눈치챈 친구들 까지도 거짓말에 동참하는 악순환이 시작됐다.

교묘히 데이트 시간을 조정하는 대만 친구는 위태롭기만 했다.

혹시라도 누군가 놓고 간 머리핀이나 립스틱등 여자 용품이 있는지, 살펴야 했고 발견된 용품은 내 방이나 일본 룸메이트 방으로 옮겨졌다.


3개국이 연결된 삼각관계

무슨 일이 터져도 터질 텐데 언제 어디서 터질지가 관전 포인트였다.


삼각관계의 당사자 한국 여자와 일본 여자.

두 여자의 촉이 발동되었다.

먼저 한국 여자, 남자 친구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안 하고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인종부터 누르고..

매의 눈으로 어떤 꼬투리, 양다리의 증거라도 찾으려 했다.

두 사람이 소리 높여 싸우는 횟수는 늘어만 갔다.

바람의 증거를 찾는 순간 뭐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불쑥불쑥 나타나는 여자가 어느덧 공포스러워졌다.


한 집에 사는 친구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만 친구는 곡예를 이어갔다.

역시나 바람둥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이쯤 해서 결론을 말하자면,

두 여자가 마주친 적은 없었지만 룸메이트의 양다리는 발각되었다.

한국 여자친구가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 집을 드나들던 친구들 중 한 명이 비밀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배신자 밀정(?)인 줄 알았는데 그 한국 여자를 짝사랑하던 다른 한국 남자였다.

인생 참 알 수 없다..

아무튼 여자는 열이 받아 우리 집을 습격했고,

대만 친구의 책상을 뒤엎는 것으로 인연을 끝냈다.

그리고 다른 한 명, 일본 여자.

우리 집을 방문할 때는 언제나 미리 연락을 하던 여자.

행동이 가만가만하던 이 여자는 이미 진작에 어떤 눈치를 채고 있었단다.

여사친이기도 했던 이 여자에게 물었다.

"바람피우는 남자의 증거 같은 걸 찾고 싶지는 않았어?"

"아니, 그런 게 싫어.. 방문하는 날짜와 시간을 미리 알린 건데.. 증거 같은 걸 왜 보고 싶겠어!"


그리고 복수라고 해야 할까! 간혹 자신의 물품을

의도적으로 남겼단다.

남자 친구가 쉽게 찾을 수 없는 작은 머리 고무줄 같은 걸 침대 밑에 놓았다는 치밀함(?)


남자 친구의 바람 증거를 잡아 깨끗이 헤어지고 미련을 안 남기려 했던 게 한국 여자의 마음이었다면,

일본 여자는 바람피우는 남자의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으니 컨트롤할 수 있는 본인의 마음에 집중했던 게 아닐까!

보기 싫은 거 안보며 마음 편하려는 단순한 생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남자 친구 앞에서의 침착함은 놀랍기만 했다.


단지 두 여자의 상황을 놓고 일반화할 생각은 없지만 일본 여자의 냉철함이 기억에 남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부류의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한 순간의 화풀이보다는 시간을 갖고 냉철하게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이 용의주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뒷 이야기.

몇 년 전 대만 친구 (맞다 그놈), 일본 여사친 (맞다 그 여자), 나까지 모두가 도쿄에서 만났다.

시간이 흘러 셋의 관계는 그냥 오래 안 친구들로 진화했다.

간혹 서로가 연락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서로의 생활이 있고

사는 나라가 다르다 보니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언젠가는 얼굴 보자던 약속은 더 늙기 전에 보자며

나의 한국 방문에 맞춰 갑작스럽게 이뤄졌다.

결혼들은 이미 했고 아이들까지 있는 국적 다른 아저씨, 아줌마가 10여 년 만에 만나 수다를 떨었다.

예전에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를 이야기하며 또 술을 마셨다.

그 당시 이 두 인간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나.

본의 아닌 거짓말과 침묵을 행사했던 나.

나에게 섭섭함이 남아 있을지도 모를 여사친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여기 이 놈 때문이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를 이해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여사친보다 내 마음 편하려고 한 사과가 아니었나..

다시 미안해졌다.

한 때 연인 관계였던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추억이라는 단어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좋은 기억, 나쁜 기억도 이제는 추억일 뿐이었다.


서로의 기억을 나누며 반나절을 보내고,

언젠지 모를 다음을 기약하며 각자의 갈 길로 돌아섰다.

말은 안 했지만 각자의 가족에게 돌아갈 시간.

추억은 다시 저 깊은 다락방 같은 곳에 가둬야 할 시간.

사실, 그때 그 젊었던 시절에도 그리움에 몸서리 칠 시간이

곧 올 거라 알고 있었다.

그리움에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괜히 무거워졌던 발걸음이 아내를 생각하니 가벼워졌다. 다행이다.


두 사람을 만나고 돌아온 저녁 아내가 물었다.

"그래서 둘 만의 시간을 갖게 해 줬어?"

"아니.. 쭈욱 셋이 같이 있었는데.."

"이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눈치가 없네!"라는

윽박이 귀를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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