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모녀가 텔레비전 앞에서 대동단결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꽁냥 거리는 연애드라마나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볼 때다. 젊은 남녀가 아슬아슬한 밀당을 할 때면 “말을 하라고!” 고함을 지르며 딸과 서로 부둥켜안고 꺅 꺅 소리까지 지른다. 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남편과 작은딸은 이게 무슨 난리인가 싶어 거실로 뛰쳐나온다.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남편은 나를 보며 나잇값 못한다며 쯧쯧거린다. 수려한 외모와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준연예인급 일반인들을 한집에 모아놓으면 누군들 사랑에 안 빠지겠냐고 구시렁거린다. 감미로운 음악과 몽환적인 화면, 연출자 잔머리에 놀아나는 모녀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다. ‘촬영 끝나면 현타(현실 자각 타임) 와서 바로 이별할걸’ 이러며 산통을 깬다. 어휴, 멋없는 작자 같으니라고. 그리고 나잇값이 뭔데?라고 남편한테 따지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찔리는 게 많아서다.
‘엄마, 나잇값 좀 하라고!’
20대의 내가 엄마한테 했던 말이다. 물론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수도 없이 말했다. 남편과 사별후 40대의 엄마는 우리를 홀로 키워내느라 절박하고 치열하게 살았다. 10년 후 50대의 엄마는 외모와 옷차림에 부쩍 신경 썼다. 엄마가 어떤 아저씨를 서울까지 데려와 소개했을 때의 당황스러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나. 아저씨 앞에서 수줍은 미소를 띠며 설레하던 엄마가 낯설어 미칠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매일 전화로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누던 모녀는 순식간에 서먹한 관계가 되었다. 아저씨와 좋았던 엄마의 시간이 꽤 많았음에도 결국 그때의 나는 엄마 인생 끝자락의 아저씨와 힘들었던 시간만 기억했다. ‘거봐, 나잇값 하면서 그냥 우리만 보고 살라고 했잖아.’
그런데 그때의 엄마 나이 언저리쯤 되고 보니 문득 죄스러워진다. 죄스럽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석고대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나잇값 좀 하라’고 독기를 품던 내가 나잇값은 원래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줌마가 주책맞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사방천지 설레는 일이 넘친다. 딸들이 화장을 하고 구두를 또각거리며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꼭 내가 데이트를 나가는 것처럼 가슴이 뛴다. 반듯하고 의젓한 청년이 하얀 치아를 보이며 웃기라도 할라치면 이 나이에도 심쿵한다. 바바리코트 입은 머리 희끗희끗한 미중년의 중저음의 목소리만 들어도 입꼬리가 올라간다. 어디 나를 뒤흔드는 게 사람뿐이겠나. 낭독이라는 세계에 처음 발을 내디딜 때도 그랬고 책을 공저할 때도 설렜다. 밧줄을 잡고 암벽을 오를 때도 그랬다. 산책길에 만난 앙증맞은 새의 지저귐에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나뭇잎 떨어진 자리 빨간 열매 하나에도 가슴이 벅차다. 분명 설렘의 지평이 사시사철 변하는 사소한 일상의 변화로 넓어진 건 나이가 가져다준 선물임이 틀림없다.
나이 든다는 것은 어쩌면 계속 외로워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주위 어르신들이 인생 말년에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걸 수도 없이 봤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그 역할을 다해 늙음, 아픔, 이별 이런 부정적인 단어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때니 당연하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러기에 더욱 재밌게 살고 싶은 욕망이 넘실댈 수도 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다 겪어본 나이, 그렇기에 더 신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결국, 재밌게 나이 드는 게 정답인데 누구와 무얼 해야 즐거울 것인가. 새로운 인연도 만나고 낯선 일에도 용기 내어 도전해 보기 그럴 때 ‘설렘’이라는 게 생긴다.
노년의 삶에 외로움이 필수라면 거기에 ‘안 해본 것’을 자꾸 넣어보자. 그래서 외로움으로 기울어질 일상에 설렘이라는 것들을 채워 균형을 잡아가는 게 인생 후반기의 삶의 지혜일지도 모르겠다. 아픈 무릎을 짚고 나를 가슴 뛰게 하는 것을 찾아서 해보기, 그것은 무언가를 계속 배우고 도전하는 일상일 것 같다. 한글을 배우며 설레는 할머니들이 그렇듯, 가슴속에 품었던 그림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태우는 할아버지가 여전히 활력 있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