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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지금 야생화 천지

<몽골 걷기 1>

by 포롱

“몽골 트레킹 가고 싶은데 같이 가실 분?”

지난 4월, *연 선배의 제안에 냉큼 손을 들었다. 몽골도 트레킹도 매력적이었지만, 사실 그보다도 선배와 추억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개인적으로 참 고마운 분이다. 몇 년 전, 마음이 복잡해 가출 여행을 감행했을 때 말없이 재워주고, 술 사주고, 함께 걸어주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만나면 늘 따뜻하고 편안하다.

짐은 고민할 것도 없었다. 평소 입던 등산복과 등산용품만 가득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출발 전날까지 정신없이 바빠 환전도 못 한 채, 트래블 카드 하나만 달랑 들고 나섰다. 남편은 혼자 싸돌아 다니기 시작한 마누라가 불안했는지 “남자 조심해!”라는 이상한(?) 환송 인사를 건넸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출장 떠나는 남편에게 매번 했던 말이기도 하다. “여자 조심해!”

KakaoTalk_20250804_071807552_03.jpg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야크떼


배려심 깊은 *연 언니는 공항부터 살뜰하게 나를 챙겼다. 모닝캄 카페테리아에서 아침도 사주고, 비행기에서는 푹 자라며 귀마개도 건넸다. 기내용 식사는 포기하고 세 시간 푹 자고 났더니 어느새 울란바토르 공항. 여행사 깃발 아래 모이니 대부분 60대 부부들이었다. 우리는 자연스레 혼자 온 여성 두 분과 넷이서 방을 함께 쓰며 어울렸다.


첫날의 여정은 테를 국립공원 ‘올레 3길’ 트레킹. 제주올레와 KOICA가 함께 만든 이 길은 몽골에서 가장 아름다운 트레킹 코스로 손꼽힌다고 한다. 길이만 17km. 말 타는 게 일상인 몽골인들 눈엔 줄줄이 걷는 우리 모습이 꽤 신기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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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마다 풀내음과 꽃향기가 번져왔다.

시원한 풀냄새가 인사를 건네고, 야생화와 초원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졌다. 몽골의 짧은 여름, 7~8월에만 피는 귀한 풍경.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눈부신 들꽃들. 저 아래 양 떼가 풀을 뜯고, 언덕 위에는 야크들이 느긋하게 머물고 있었다. 풀숲 사이로 들려오는 말 울음소리. 우리는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며 그들의 일상에 방해되지 않기를 바랐다.

무턱대고 걷다간 소똥, 말똥, 양똥, 염소똥, 야크똥 테러를 당하기 십상이다. 기온은 높지만 습도는 없어 상쾌했고, 바람 한 줌이면 행복지수가 수직 상승했다. 푹신한 흙길 위로 반짝이는 노랑, 하양, 보랏빛 야생화들이 별처럼 흩뿌려졌다.

길 끝자락에서 만난 테를지강은 생각보다 소박했지만, 물 귀한 몽골에선 얼마나 귀한 생명줄일까. 자작나무가 늘어선 산길을 따라 걷다 보니, 소풍을 나온 몽골 가족들이 손을 흔든다. 우리도 반갑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KakaoTalk_20250804_071807552_07.jpg 테를지강변으로 몽골인 가족들이 텐트를 치고 소풍을 나왔다.

여행의 묘미는 결국 사람이다.

멋진 백발의 호여사님은 ‘왕언니’가 되었고, 나보다 조금 어린 *경 씨는 금세 편한 동생처럼 느껴졌다. 천성은 못 속이는지 *연 언니와 나는 철없고 발랄한 모습으로 이곳저곳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용히 걷고 싶던 분들에겐 꽤나 소란스러운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저녁 자리에서 한 신사분이 맥주를 쏘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게르촌 숙소는 예상보다 훨씬 현대적이었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안에 있다는 사실에 환호했지만, 기쁨도 잠시 우리 방만 저 아래 지하에서 퍼 올린 얼음물이 나왔다.

성격 화끈한 *연 언니는 “이쒸~!” 외마디를 날리며 냉수 샤워를 감행했고, 여행 경력 만렙인 왕언니도 말없이 씻고 나왔다. 소심하고 겁 많은 나는 쫄쫄쫄 흐르는 찬물 앞에서 심호흡을 수백 번 하며 겨우 샤워를 마쳤다. *경 씨도 나와 비슷했는지 머리, 팔다리 등 부위를 나눠가며 철저히 문지르는 신중함을 보여줬다.

“그래도 씻었잖아.”

혹시 샤워를 못 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했기에, 우리는 이 정도면 최상의 조건이라며 깔깔거리며 담요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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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 번째는 어떤 조건에서도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 두 번째는 어떤 경험에도 자기 기준부터 앞세우는 사람이다. 나는 늘 “좋다, 감사하다”를 외치는 이들과 함께하게 되니,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

게르촌의 밤은 제법 쌀쌀했다. 한밤중 이불을 겹쳐 덮고 자다, 새벽녘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 맑은 하늘에 쌍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이번 여행, 분명 오래도록 웃으며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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