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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못된 것들!

(몽골 걷기 3) 흡수골의 정령들이 노하셨나

by 포롱

몽골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몽골의 알프스’ ‘어머니의 바다’라 불리는 흡수골 호수를 바라보며 걷는 일정이다. 흡수골은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서북쪽으로 800km, 시베리아 낙엽송이 빽빽한 숲 속에 자리한다. 해발 1,600m 고지에 제주도 면적의 1.5배, 남북 길이만 136km에 이르고 가장 깊은 곳은 수심 262m로, 러시아 바이칼 호수의 상류지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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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입구 하트갈에 도착한 날, 첫 트레킹 장소는 이름도 가물가물한 야트막한 봉우리였다. 등산객이라면 보통은 어미 오리를 뒤따르는 새끼들처럼 산대장 뒤를 따라 줄지어 걷는 풍경을 만든다. 그런데 그날 우리는 풀 뜯는 소떼나 양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오르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길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하늘 아래 꼭대기만 보고 자신만의 속도와 보폭으로 가파른 경사길을 누군가는 직진으로, 누군가는 완만한 지그재그로 걸었다. 나도 행여 내 발끝이 흐드러진 야생화를 다치게 하지나 않을까 조심조심 올랐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즈음,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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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쩍 벌어지게 만드는 풍광이 펼쳐졌다. 짙은 초록의 산이 없었다면 어디가 하늘인지, 호수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비현실적인 파랑의 파노라마가 원시의 생명줄처럼, 내 등을 넉넉하게 받쳐주고 있었다. 숨이 턱 하게 막힐 때 바람 한 줌을 보내주던 하늘과 호수가 그곳에 있었다. 그 순간 서울에 있는 두 딸을 떠올렸다. 폭염과 녹록지 않은 현실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아이들에게, 나도 저런 시원한 뒷배경이 되고 싶다. 파란 하늘을 담은 호수, 야생화 향기 가득한 울창한 숲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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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사람들은 모든 걸 자급자족한다. 말 떼와 양 떼, 소떼를 몰며 떠돌아다니니 생활도 단출하다. 초원 한가운데 유목민의 게르를 방문했을 때 보았던 살림살이들. 이불과 부엌용품 몇 개 만으로도 충분한 그들의 삶. 우유로 만든 과자와 버터를 먹고, 말젖으로 만든 마유주를 마시는 그들을 보며 고작 6일을 떠나왔을 뿐인데 커다란 트렁크 안에 수많은 잡동사니를 가득 채워 다니던 여행자는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저 드넓은 초원을 안방 삼아 사는 그들은 구름 한 조각만큼만 소유하는데 나는 뭐 그리 방방마다 빼곡하게 쑤셔 넣고 살고 있나. 그것도 다른 사람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는 한시도 버틸 수 없는 곳에서 말이다. 가져도 가져도 허기지는 우리와 작은 감사 표시에도 수줍어하며 함박 웃던 게르 안주인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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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순박한 미소가 보기 좋아 우리는 어설픈 몽골어로 자꾸 말을 걸었다.
“센빼노!(안녕하세요)”,

“바이랄라!(감사합니다)”

해 질 녘 게르촌 앞마당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양모 용품을 팔던 몽골인 가족의 따뜻한 웃음이 좋았다. 우리를 사방으로 데려다주던 젊은 운전사는 우리가 손 흔들며 아는 체할 때마다 어쩔 줄 몰라했는데 그 순진한 표정이 재밌어 또 깔깔거렸다. 이런 못된 것들! 하며 흡수골 정령께서 노하시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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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건들이 자꾸 벌어졌다.

저녁, 공용 샤워실을 갔는데 옷을 다 벗고 물을 튼 순간, ‘칙—’ 하는 소리와 함께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정전이었다. 그 뒤로도 내가 씻으려고만 하면 이런저런 사정으로 헛걸음을 했다. 예감이 안 좋다. 그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일상인 듯했다. 게르촌 관리인에게 뭐가 문제냐, 씻고 싶다 등등 하소연해봐도 영어를 못 알아듣는 건지, 아님 왜 그런 일에 호들갑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멀뚱멀뚱한 표정만 지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불이 나가도 태연하던 그들이니, 이쯤 되면 그냥 포기하고 별빛 아래서 조용히 잠이나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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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밤은 11시가 되어야 완전히 어두워진다. 며칠간의 장거리 이동으로 피곤했던 우리는 초저녁부터 깊이 잠들었지만, 새벽녘 *연 언니의 부름에 눈을 떴다.

“별 보러 가야지. 이거 보러 왔잖아.”

쌀쌀한 공기에 옷깃을 여미고 네 명이 호숫가로 향했다. 고개를 드니,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깜깜한 하늘에 보석처럼 박힌 별들. 몇 해 전 소백산에서 만났던 별이 친근했다면, 몽골의 별은 경외로 다가왔다. 문명의 불빛이 닿지 않는 원시의 하늘은 신령스러울 정도였다.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아를 가늠해 보다, 사진은 포기하고 눈과 마음에 담았다.


돌아오는 길, 또 사건이 벌어졌다. 왕언니는 졸리다며 먼저 게르로 향했고, 나머지 셋이 화장실을 들렀다. 볼일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미 잠겨버린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저절로 바깥에서 문이 잠기지?

“여기요! 헬프 미 플리즈!”

창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다. 모두 곤히 잠들어 있으니 들을 리가 없다. 그래도 자다가 누군가는 화장실 한 번쯤은 오겠지.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여기서 자야 하나, 셋이서 이 기막힌 상황을 어찌해야 하나 서로 쳐다보며 황당해했다. 그러다 혼자 아닌 게 어디냐며 그래도 셋이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위로했다.

“카톡으로 구조 요청해요!”

여행 시작 때 만든 17명 카톡 단체방이 떠올랐다.

“그래, 17명 중 분명 한 명은 볼 수도 있어.”

우리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카톡방에 긴급구조요청 문자를 날렸다.

‘여자 화장실에 3명이 갇혔어요. 구해주세요.’


“누가 읽었다! 카톡 숫자 하나가 줄었어!”

“정말요? 어? 또 하나 줄었어요! 둘이나 읽었어요.”

“진짜? 우리 이제 나갈 수 있어! 어? 또 숫자 줄었어.

"됐어! 살았다! 세 명이나 읽었어.”

우리 셋은 너무 기뻐 화장실에서 방방 뛰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이상한데? 왜 안 오지?”

“잠깐, 17명 중에 3명이 읽었다는 건....”

“아! 우리 셋이 읽었잖아.”

그 순간 우리는 '아이고 배야' 하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이 바보 같고 어이없는 상황이 눈물이 날 정도로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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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러나 우리 이제 어쩌지? 여기서 자야 하나?”

다시 현실로 돌아오니 기가 막혔다.

다시 한번 단체방에 카톡에 구해달라 문자를 남겼다. 제발 누구라도 한 명만 봐라.

“제발 우리를 구해주세요.”

흡수골을 지키는 12 정령님,

이 땅과 물에 조용히 머물다 돌아갈게요...

행여 그들의 미움을 샀을까 여행객은 가슴이 콩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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