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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동시집

뭐든 상상 그 이상을 보여주는 아이들

by 포롱


아홉 살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에 감동할 때가 있다. 무엇이든 가르치면 스펀지처럼 쏙쏙 빨아들여, 교사를 깜짝 놀라게 만들 때가 있다. 이번 주 우리 반 동시 수업이 그랬다.


국어 1단원 ‘분위기를 살려 읽기’를 배우며 시를 낭송하고 이야기를 낭독했다. 나는 내친김에 아이들에게 시를 직접 써보게 하리라 마음먹고, 꽤 많은 공을 들였다.


먼저 동시의 매력을 알려주었다. 짧은 글로도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것. 읽다 보면 눈앞에 장면이 그림처럼 펼쳐진다는 것. 나도 모르게 노래 부르듯 리듬이 느껴진다는 것을 여러 예시 자료로 보여주었다. “너희가 똑똑하니까 비유, 리듬, 의인법 같은 어려운 말도 배워보자” 했더니 아이들 눈이 반짝거렸다.

그래도 제일 좋은 글감은 아이들의 생활이다. 글똥누기 시간에 ‘우리 반 이야기, 우리 집 이야기, 방학 이야기’를 마음껏 써보라 했다. 쓱쓱 몇 분 만에 다 썼다며 공책을 내미는 아이도 있고, 연필을 꼭 쥐고 골똘히 고민하는 아이도 있었다. 받침이 뭐냐고 묻는 아이, 글자 하나 못 쓰고 괴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 여러 개 써도 되냐며 신이 난 아이도 있었다. 나는 “시간은 충분하니 천천히 해보자”며 곁에서 조금씩 첨삭지도를 해줬다.

거친 재료를 행과 연으로 다듬고 양념을 살짝 얹어주었을 뿐인데, 아이들은 “선생님이 마법 부리는 것 같다”며 감탄했다. 사실 손 하나 안된 수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머리 짧은 우리 선생님

(박*후)


3월 첫날 교실
짧은 머리 선생님
남자인 줄 알았다


목소리 들어보니


여자 선생님이다


아깝다
남자 선생님이랑
수업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남자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는 시후의 소망. 하지만 우리 학교 70명 넘는 교사 중 남교사는 단 한 명뿐이라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황당할까.)


야구

(이*헌)


야구하다가
아빠 공에 맞아

코피 났다


으악
아빠는!
으아악
아빠 때문에!
으악 으아악!
아빠 두고 보자


(아빠와 캐치볼 하다 코피 났던 이야기를 이렇게 실감 나고 재밌게 풀어내니, 아이들은 배꼽 잡고 웃었다.)


개구리 점프 (오*진)


개골개골
개구리 시합
폴짝 점프했는데


친구 개구리들

멀리 뛰고
높이 뛴다


내 개구리
벌러덩 뒤집는다
아이고 속터져


애교만 부리는
하트 눈 달린
멍청한 내 개구리

(그 전날 종이 개구리를 접어 시합을 했더니 나온 작품. 유진이는 개구리 눈에 하트 스티커를 붙였다.)


현미밥과 밥알들

(이*민)


우리 선생님은 현미밥
우리 반 친구들은 밥알들


현장체험학습 갈 때도
졸졸 따라간다

(작년 선배들이 만든 문집 제목을 흉내 내며 쓴 시. 창작의 첫걸음은 모방이라 했던가, 흉내는 때로 훌륭한 시작이 된다.)

협박죄

(장소*)


오늘 우리 반에 협박죄가 있었다


어떤 친구는

물통으로

어떤 친구는
식판으로


으악! 복잡해.
누굴 먼저 재판해야지?

(“협박도 죄다”라는 내 훈시 뒤, 판사 역할을 맡은 아이가 쓴 시.)


… 당연한 줄 알았는데

(강*윤)


엄마가 밥을 차려주는 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엄마가 정성을 들여 차려주신 거였다


아빠가 장난감 사주는 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아빠가 정성껏 일을 해 번 돈으로
사주는 거였다


우리 가족은
당연하지 않다

(이 시가 낭송되자 아이들 모두 “와~” 감탄사를 터뜨렸다. 아홉 살의 눈으로 세상을 이렇게 바라보다니!)

주말 글똥누기도 동시로 써도 되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그럼 그럼, 좋지!” 대답하자 한 친구가 말했다.
“근데 선생님, 동시 쓰려면 생각을 많이 해야 해서 시간이 더 걸려요.”

벌써 알아채다니. 그렇다. 동시는 짧지만 깊이 생각해야 쓸 수 있는 글이다.


늘 느끼지만 아이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을 보여준다.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작은 일상에서도 노래를 발견한다. 그래서 아홉 살의 교실은 늘 작은 시집 같다. 그 시집을 매일 펼쳐보는 첫 번째 독자는 나다.


(덧붙이는 글: 한 명 한 명 모든 아이들의 시가 반짝거렸다. 다 자랑하고 싶지만 몇 편밖에 소개하지 못한 것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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