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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밤' 무대에 서다

by 포롱
“낭독대회 한번 나가볼까요.”

낭독을 배우던 친구들과 얼떨결에 의기투합했다. 2년 가까이 배웠으니, 이제 무대에서 한 번 펼쳐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신청하고 보니 단순 낭독이 아니라 희곡 낭독대회였다. 우리는 그저 ‘낭독’이라는 단어에 꽂혀 있었다.


작품은 고민 끝에 낭독교재로 배운 루리 작가의 '긴긴밤'. 문제는 극본이었다. 결국 내가 손을 들었다. 대본을 쓰고 함께 읽다 보니 아이디어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20분 시간 제한 안에 담아내려 몇 번씩 갈아엎은 끝에 ‘노든’이 들려주는 모노드라마에 다른 인물이 중간중간 등장하는 형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전국에 흩어진 다섯 명은 천안에 모여 리딩을 하고, 이후에는 매주 줌으로 연습했다. 성우님의 코칭도 받았다. 그런데 무대에서 희곡을 낭독한다는 건 단순한 낭독이 아니었다. 목소리 연기, 몸짓, 표정까지 요구됐다. 팔자에 없는 배우까지 하게 된 셈이다.


내 역할은 잠깐 등장하는 펭귄. “움직이지 마! 여기 알이 있단 말이야!”라고 소리치다 울며 죽는 연기까지 해야 했다. 겨우 2분이지만 감정 소모가 커서 연습 때마다 녹초가 됐다. 그럼에도 팀원들은 든든했다. 노련하게 이끄는 ‘노든’, 늘 따뜻하게 감싸주던 ‘노든 부인’, 발랄한 ‘어린 펭귄’, 묵묵히 성실한 ‘앙가부’. 팀워크 덕분에 우리는 조금씩 달라졌다.

책을 처음 낭독하며 받았던 감동을 무대에서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매일 밤, 우리는 ‘노든’이 되고 ‘치쿠’가 돼서 긴긴밤을 보냈다.

대회를 앞두고, 우리반 아이들에게 연습 녹음본을 들려줬다. 아홉 살들이 귀로만 듣고도 그림을 그리고 캐릭터를 분석했다.

“치쿠 실감 나는 연기 최고예요.”

“노든의 목소리에 감성이 있어요.”

잔뜩 긴장하고 있던 팀원들도 어린 팬들의 응원에 힘을 얻었다. 초등생에게 감정과 메세지가 전해졌다면 이미 절반은 성공이었다.

대회 당일, 혜화동 소극장 앞. 최종 리허설을 하며 캐릭터에 몰입해 울고 웃는 우리를 행인들이 신기하게 쳐다봤다.

“진짜 배우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상금 얼마예요? 그거 타면 뭐 하죠?”

“10만 원쯤?”

“에이, 그 정도밖에 안 돼요?”

우린 웃으며 긴장을 풀었다.


무대의 불이 켜졌다. 조명 탓인지 관객은 보이지도 않았다. 들리는 건 서로의 호흡과 눈빛뿐. 그 순간, 세상에 하나뿐인 외롭지만 용감한 ‘흰 바위코뿔소’와 함께 존재했다. 각자의 소리로만 모든 걸 전하는 드라마가 펼쳐졌다.

불이 꺼지고 박수가 터졌다. 그 가슴벅차면서도 슬픈 것 같기도 한 복잡 미묘한 감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감동? 성취감? 허탈함? 어떤 문자로도 담을 수가 없다.

무대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이 최고의 무대였어.”

혼자였다면 버거웠을 도전, 함께였기에 마지막까지 즐겁고 행복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저녁밥을 한다. 그리고 어젯밤의 박수와 환호성을 떠올려본다.

“여보? 설거지는 여배우 남편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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