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건너 가족을 이어준 노래
음치에 박치인 남편과 살고 있다.
노래방 가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던 그가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콘서트가 있다고 했다.
“조용필.”
그의 소원은 뜻밖에 두 번이나 이루어졌다.
지난 8월 고척스카이돔에서 네 식구가 응원봉을 흔들며 떼창 했던 명곡을
추석연휴 안방 1열로 또 즐겼다.
KBS 추석 대기획 '조용필 – 이 순간을 영원히'.
이상하지만 감동은 텔레비전 화면이 더 컸다.
더 생생하게 현장 분위기를 살린 TV 편집의 힘인 것 같다.
‘가왕’ 조용필이 콘서트 무대가 아닌
TV 화면으로 대중에게 돌아온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벅찬 순간.
우리 네 명은 또 텔레비전 앞에 나란히 앉았다.
50대부터 70대까지의 중장년층,
그리고 20대 젊은이들까지
세대를 초월한 함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
남편은 응원봉을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내 입에서도 줄줄줄 가사가 흘러나왔다.
그날 현장에서 느꼈던 전율이 또 일었다.
이문세와 신승훈을 들으며 자란 내가
왜 조용필의 노래를 이토록 많이 알고 있을까.
생각해 보니 그의 노래는 내 인생의 필름 곳곳에
배경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한오백년 살자는데 웬 성화요~.”
법당이 있던 향 냄새 가득한 외갓집,
조용필이 TV에 나올 때면
무섭던 할머니의 표정이 유독 부드러워졌다.
삶의 고단함을 견디며 부르던 그 노래 속에는
‘한(恨)’을 품은 세대의 위로가 있었다.
“허공 속에 묻어야만 할 슬픈 옛이야기~.”
농한기 나들이에서 마이크를 잡던 젊은 엄마의 눈빛은
어린 내게 낯설고도 슬펐다.
힘겹게 4남매를 키우던 그 시절,
그 노래는 엄마의 숨구멍이자 위로였을 것이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음정도 박자도 틀렸지만,
술기운에 절규하듯 부르던 아빠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하다.
그땐 그저 창피했는데,
이제는 안다.
그 노래 속 외로움이 곧 아빠의 인생이었다는 걸.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
빠르고 경쾌한 리듬에 반해 따라 부르던 노래.
세월이 흘러 다시 들으니
그 소녀가 바로 나였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슬퍼질 땐 차라리 나 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서울로 올라와 혼자 공부하던 시절,
그의 노래는 불안하고 힘겨웠던 날들을 잠들게 했다.
남편이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부르며 목청을 높인다.
“바람처럼 왔다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작은 딸은 옆에서 ‘바운스’를 신나게 따라 부른다.
“그대가 돌아서면 두 눈이 마주칠까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취준생 큰딸은 ‘그래도 돼’의 가사에 감탄한다.
“이 길이 힘이 겨워도, 이제는 믿어, 자신을 믿어.”
세대는 달라도, 그의 노래는
여전히 우리를 같은 마음으로 만든다.
추석 연휴 나들이길 차 안에서는
조용필의 노래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가 부르던 많은 노래가 다 그분 거였네요.”
딸들의 말에 그냥 웃음이 났다.
나와 남편은 신이 나서,
그가 왜 가왕인지 그리고 그의 노래가 왜 ‘명곡’인지 열변을 토했다.
아이들이 귀 기울여 들어주며 동의해 주니,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의 음악과 함께 살아왔다는 사실이,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이 자랑스럽다.
2025년 가을,
조용필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그의 노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