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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이 불쑥 부를 때

by 포롱

불쑥, 지리산이 가고 싶었다.
지리산은 지금껏 당일 산행을 한 적이 없다.
서울에서만 편도 네댓 시간 차를 타야 산아래 도착하고 어느 코스를 택해도 8시간 이상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여름휴가나 겨울방학을 이용해 대피소에서 1박을 하거나, 2박 3일 종주를 하곤 했다.

한여름의 지리산엔 폭염 중에도 선선한 바람이 분다.
살갗을 에는 영하의 겨울 능선은 의외로 포근한 맛이 있다.
천왕봉의 위압적인 칼바람과 압도적인 설경도 환상적이다.
이 가을... 깊은 계곡의 단풍은 또 얼마나 멋질까.
KakaoTalk_20251027_205434008_05.jpg 지리산 뱀사골의 가을

마침 토요일 오후, 시댁 형제들 모임이 남원 근방에서 있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남편에게 계획을 공유하고, 금요일 오후 서울을 출발했다.
언제나 즉흥적인 아내의 제안에도, 반차까지 내고 흔쾌히 따라주는 남편.
이럴 때는 참 고맙다.


늦은 밤 산 아래 숙소에 도착해 눈만 붙이고, 새벽같이 길을 나섰다.

지리산을 오를 때면 언제나 이름에서부터 압도당한다.

노고단, 피아골, 백무동, 칠성계곡, 뱀사골…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은 이름들.
그중에서도 ‘뱀사골’이라니!
풀숲 사이로 독이 오른 뱀이 스멀스멀 기어 나올 것만 같다.
지리산을 배경으로 한 수많은 소설과 영화, 그리고 드라마처럼

계곡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아픔이 스며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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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사골 탐방센터 앞에 섰다.
마침 단풍축제가 열리는 날이라 이른 아침부터 천막 아랫사람들이 분주하다.
지도를 펼쳐 오늘 동선을 정해 본다.
반선마을에서 출발해 와운교–뱀사골–화개재–삼도봉을 거쳐 다시 뱀사골로 돌아오는 원점 회귀 코스.
총 20km가 넘는 거리다.
반야봉까지 오르고 싶지만, 오후 세 시 모임에 맞추려면 무리다.
오늘은 욕심을 내려두고, 풍경을 즐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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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 초입부터 시원한 계곡물소리에 마음이 시원해졌다.
예상외로 단풍은 없지만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이 눈을 사로잡았다.
‘신선길’이라 불리는 산책로를 걸으니 행복지수가 절로 오른다.

남편의 자화자찬이 시작됐다.
“당신, 시집 참 잘 왔어. 지리산 아래가 시댁이니 이런 호사를 누리는 거야!”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가만 있자니 손해 보는 것 같다.
“그건 그래. 그런데 당신도 장가 참 잘 왔지. 어떤 마누라가 뱀사골 걸어 지리산을 오르자고 하겠어?”
남편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닭살 부부라 해도 어쩔 수 없다.
20년 넘게 굳어진 우리 부부의 화법,
‘서로 치켜세워주며 착각하며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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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쯤 걸었을까. 편안한 데크길이 끝나고, 산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길은 생각보다 완만했다.
오르막인지조차 모를 만큼 완만한 길이 7km나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때까지 이 길로 남원 산내면의 농사꾼들이 마차를 몰거나 지게를 지고 화개재를 넘었다니,
얼마나 걷기 좋은 길이었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고도가 높아지면 단풍이 보일까 했는데 여전히 초록이다.

계곡을 따라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와 유리알 같은 소(沼)가 단풍을 대신한다.
바위가 병풍 같아 ‘병풍소’, 제를 올렸다 하여 ‘제승대’…
이름마다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그중 ‘간장소’가 특히 인상적이다.
옛날 짐꾼이 소금을 지고 오다 넘어져 계곡물이 짜졌다는 설화.
간장처럼 짠 물이라 하여 간장소라 부른다 한다.
이 물을 마시면 간장까지 시원해진다니, 산의 유머도 참 정겹다.

마차의 종점 ‘막차’ 표지가 나타나자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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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고르며 걷는데, 앞서가던 머리 희끗한 어르신들이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소?”

“서울이요.”

당신들도 서울서 왔다며 친근함을 표한다.

40년 지기 직장동료들이라며, 70대 중반의 나이도 스스럼없이 밝혔다.

아직도 함께 산을 오르는 그들의 체력과 우정이 부럽다.

“이따 삼도봉에서 재밌는 거 보여줄게.”
할아버지의 한마디에 괜히 기대가 되었다.

이윽고 지리산 주 능선 중 가장 낮은 고개, 화개재가 나타났다.

KakaoTalk_20251027_210109211.jpg 화개재에서 본 경남 하동쪽 산세. 끝도 없이 산이 이어지는 걸 보면 지리산이 얼마나 큰 산인지 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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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종주 때는 지도 위 점으로만 스쳤던 곳이지만,

오늘은 다르게 다가왔다.

경남 하동 화개면과 전라도 남원 산내면이 물물교환을 하던

옛 장터의 풍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잠시 숨을 고르고 삼도봉으로 향했다.
가파른 계단이 이어졌지만 힘들지는 않았다.

20분 정도 오르니 오늘의 목표지점인 삼도봉에 올랐다.

세 개 도(道)의 이름이 삼각뿔 모양의 비석에 새겨져 있다.
말뚝을 돌며 경상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를 단 몇 초 만에 밟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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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라면과 삼각김밥으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등산길에서 만났던 어르신들이 숨을 헐떡이며 올라오셨다.
그들이 보여주겠다는 건, 휴대폰으로 찍은 옛날 사진들이었다.
1971년 노고단과 천왕봉, 그리고 세석평전.
흑백사진 속 웃통 벗은 청년이 활짝 웃고 있었다.
“20대 초반부터 지리산을 다녔지.”
그렇게 산을 다닌 지가 벌써 54년째라 했다.
“이젠 점점 자신이 없어져서 언제가 마지막일지 모르겠어.

고관절도 아프고 무릎도 아프고...”
가는 세월이 야속하다는 말에 괜스레 마음이 울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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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길에 남편에게 물었다.
“우리도 70대 중반까지 다닐 수 있을까?”
남편이 웃으며 대답했다.
“허벅지 굵기로 봐선 당신은 80대까지 가능해.”
그래, 허벅지를 더 키워야겠다.


오후 네 시가 넘어서야 뱀사골을 겨우 내려왔다.
원 없이 걸었더니 온몸에 행복한 피로가 번진다.
기분 좋은 근육통과 뿌듯함, 그게 바로 지리산의 선물이다.

요즘 들어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지리산이라면 구석구석 다 가보고 싶고,
모든 능선과 계곡을 밟아보고 싶다.

지리 10 경도, 모든 등산로도 하나하나 채워가고 싶다.'

지리산 아랫마을로 시집와서 그런가.

오늘처럼 이렇게 즉흥적이고 즐거운 길이라면,
그 여정이 평생 이어져도 좋겠다.
KakaoTalk_20251027_205627407.jpg 하산길에 만난 와운마을의 '천녕송'. 100년도 채 못사는 우리가 천년을 푸른 소나무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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