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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Oct 12. 2021

교육행정직 intro

교육행정 직원의 하루

공무원 초임 시절 한 선배를 만났다


나의 직속상관이었는데, 서울특별시교육위원회 ㅇㅇ교육구청 속의 ㅇㅇ중학교 서무실로 출근한 첫날, 어리바리한 내게 문교 법전이라는 시커멓고 두꺼운 책자 한 권을 툭 던져주며 읽어 보라던 서무과장이었다. 지금은 각급 학교에 행정실이라는 문패를 달고 있지만, 1987년 당시에는 모든 학교에 서무실(과) 있었고, 그 위치는 교장실 바로 옆이었다. 규정상의 공식 직위는 '서무책임자'였지만 우리는 '서무실의 장'인 그를 '서무과장'이라 불렀고, 이른바 학교의 실세인 교장선생님 다음으로 넘버 투는 교감선생님이 아닌 서무과장이었던 시절이다.


서울특별시교육위원회(시교위) 소속 우리 학교에서 문교 법전은 시교위 재무회계규칙과 함께 학교 행정실에서 일을 하면 꼭 알아야 할 수많은 규정과 규칙이 들어 있는 법령집 중 기본서였다. 그 이후에도, 나의 첫 사수이자 선배인 우리 학교 서무과장은 시교위 재무회계규칙과 조달관계법령집, 그리고 물가 가격 정보라고 하는 투터운 월간지와 그 외에도 더 많은 책들을 내게 주며 읽고 외우게 만들었다.


답을 하며 쩔쩔 메던 내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난다. 오기가 생겨서 더 딸딸 외웠다. 문서번호가 12000으로 시작이 되면, 일단은 인사 관련이고, 그 뒤의 번호 분류에 의해 전보나 승진 등으로 구분되고, 다섯 자리의 문서번호만 보아도 그 문서가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우리 과장은 이번엔 시교위 재무회계 규칙 중 내가 제일 어려워했던, 가격 조서 작성과 일위대가표 작성 부분을 질문해온다. 훅 들어온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철저하게 깨지고 말았다.   


말단 공무원 생활이 이리 피곤한 일인가? 책 속에 그것도 규정집에 묶여, 때 늦은 고시공부를 하고 있다니. 슬슬 놀며 일하는 게 공무원이라 하더니 교육행정직이라서 그런가? 공부할게 너무나 많은 시절이었다.


우리 선배 과장은 회초리만 안 들었지, 아주 엄격한 선생님이었다. 선배는 계속 나에게 질문을 하였고, 나는 그 대답을 하느라 세 달의 시간을 훌쩍 보냈다. 질문에 익숙하게 답을 할 즈음, 이번엔 내게 학교 복도 밑에 있는 비트라고 하는 건물 시설물 점검을 위한 지하 통로에 들어가 '갈라져서 오물이 새고 있는 정화조 사진을 찍어오라'라고 했다. 멸치 썩은 내가 진동하는 깜깜한 비트 속을 자그마한 플래시로 밝히며, 더듬더듬 한참을 찾아가 오물이 새고 있는 현장 사진을 찍어 돌아왔다. 온몸에 베인 쾌쾌한 냄새, 거미줄과 오물 찌꺼기가 튄 작업복을 벗고 교직원 샤워실로 직행, 구역질이 났다.  


잘 찍은 사진(?) 덕에 정화조 수리 공사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일주일 만에 공사는 깨끗이 마무리되었다. 그날 저녁 선배는 나를 데리고 영등포 중심가에 있는 주점에서 술을 퍼 먹였다. 늦은 신고 식...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이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택기를 잡고는 눈을 떠 보니 다음날 아침, 벌떡 일어나려다 퍼뜩 든 생각이 '아! 일요 일구나!'


하루 종일 술병에 시달리며 어머니가 끓여주긴 북엇국과 콩나물국을 먹다 토해내고, 먹다 토해내며 하루를 보냈다.


이렇게 나의 공직생활은 한 선배와 함께 술병을 얻어가며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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